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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하렘 순애는 순애가 될 수 없다 [VRChat 보고서 15편]

by 심해잠수부 2023. 4. 17.

농담처럼 사용하는 표현 중, '최면 순애', '조교 순애' 등이 존재한다.

히강악(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 디시콘

최면인데 어느 순간 유사 순애가 되고, 조교 순애인데 어느 순간 유사 순애가 되는 등의 전개에서 나온 단어라고 보인다. 아니면 "아무튼 순애"라는 표현으로 사용하는 단어일 수도 있고. 

어쨌든, 단어를 정의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런 단어가 있다는 얘기일 뿐이다.

최면 순애, 조교 순애, 하다 못 해 NTR 순애까지도 나는 농담처럼 들어줄 수 있고 공감까지 해줄 수 있다.

하지만 하렘 순애만큼은 인정할 수 없다. 

하렘은 여러 사람과 이어진다. 하렘은 한 사람에게 전력투구할 수 없다. 사람의 수가 늘어날수록 자원은 점점 쪼개어진다. 주인공이 줄 수 있는 몸과 시간과 사랑도 쪼개어진다. 때문에, '한 사람과 진지하고 애틋하게 사랑하는 순애'라고 볼 수 없다.


현실에서는 친구와 '항상' 붙어있진 않는다.

동거하는 연인이나 결혼한 부부가 아닌 이상, 연인조차도 '매일' 만나진 않는다(전화는 하겠지만). '많은 빈 시간 중' 어느 시간을 선택해서(약속 잡고) 만날 뿐이다. 매일 만나는 친구라고 하면 기껏해야 저녁마다 게임하는 친구 정도고, 이 친구들조차도 '게임'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자주 만나지도 않을 뿐더러, 만난다고 하더라도 '많고 많은 빈 시간 중에서' 선택해서 만나고, 만난다고 해도 큰 이벤트(여행 등)가 아닌 이상 6시간 이내로 끝난다. 덕분에 하루에 세 탕도 뛸 수도 있다. 점심 약속, 저녁 약속, 늦은 밤 술 약속. 거절하는 게 아닌 이상 웬만하면 다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오늘 봤으면 2주는 안 봐도 괜찮다.
반 년 가까이 안 봐도 카톡만 주기적으로 하면 어쨌든 괜찮은 사람도 정말 많다. 

 

하지만 VRC는 접속하는 순간부터 웬만하면 사람과 붙어있는다.

그런데, A를 만날 땐 B를 만날 수 없고, A 그룹을 만날 땐 B 그룹을 만날 수 없다. 매일 저녁 게임하던 친구가 솔로를 탈출하면 연인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게임하는 시간을 조금씩 줄일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플레이 타임이 길어질수록 친구는 늘어난다.

하지만, 모두에게 최선을 다할 수는 없다. 모두에게 잘 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욕심이다. 

친구가 많아질수록 친구 한 명에게 쏟을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든다. 친구가 많아질수록 친구 한 명에게 쏟을 수 있는 감정도 줄어든다. 현실과 다르다. 현실에서야 친구와 매일 붙어있는 게 아니니까, '빈 시간이 많으니까' 날마다 다른 친구를 만나며 감당할 수 있지만, VRC는 아니다.

VRC의 친구 관계는 '친구가 아니라' 연인을 사귀는 일과 유사하다. 

저녁 시간에 들어와 누군가를 선택하는 순간 다른 누군가는 선택받지 못 한다. 

서로가 서로의 그룹이 있고, 서로가 서로의 다른 친구와 노는 일에 불만이 없다면 관계는 '건전하게' 유지될 수 있다. 아무리 너와 내가 친한 친구여도, 나는 너가 누군가를 만나는 일을 존중하고 나와 놀지 않아도 괜찮다며 존중할 수 있다면 관계는 건전하게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항상, '조금 더 많이 친한 사람'이 생긴다.
'조금 더 많이 친한 그룹'이 생기기도 한다.

'조금 더 많이 친하다'는 의미는, 마치 연인이 생긴 듯 '왜 나를 최우선으로 선택해 주지 않느냐'고 따질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는 의미다. 다른 장소에서 주황불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을 때, '왜 인바를 보내지 않느냐' '왜 리퀘를 받아주지 않느냐' '왜 자꾸 다른 곳에서 노느냐' 따지듯 말할 수 있다.

성격 특이해서 섞이기 힘든 친구를 따로 만나고 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우르르 찾아와서 방 분위기 흐리는 게 싫어서, 아니면 새로운 친구를 나보다 더 재밌는 친구에게 뺏기기 싫어서 주황불로 해놓고 놀고 있어도, 이유 따윈 관심 없이 '왜 프빗에 박혀서는 (너와 조금 더 친한) 나와 어울리지 않느냐' 질책할 수 있다. 

나도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과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분위기와 새로운 시간 속에서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치킨을 아무리 좋아해도 3일 동안 같은 치킨을 먹으면 물리기도 하는데. 하지만 친구는 그러한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같이 자주 놀아왔던 친구는 '나를 선택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일이 정말로 많다.

걔네가 멘헤라라서 그런 건 아니다. '선택받지 못 한 자'는 어쩔 수 없이 떠올린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내가 조금 더 어울리고 싶은 상대가 다른 상대와만 진득하게 놀면 기분이 상한다. 일주일 내내 다른 사람이랑만 놀면 기분이 이상하다. 나도 너랑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VRC는 30일 중 29일 하루 4시간씩 꼬박 보는 일이 당연한 공간이다.

때문에, 하루라도 선택해주지 않으면 섭섭해한다. 아니, 다른 친구를 챙겨주느라 자신에게 소홀한 모습을 30분이라도 보면 발작하거나 크게 삐지는 사람도 있다. 과몰입이 아니라 '친구'인데도 말이다. 호이가 지속되면 둘리라고 여기듯이, 29일 동안 누려왔던 추억을 소중히 여기기보다 하루 만나주지 않을 때의 박탈감을 훨씬 크게 느낀다. 

연인도 아닌데, 왜, 너랑, 항상, 붙어있어야 하는데? 당당하게 말하면 좋겠지만, 그런 말은 쉽게 할 수 없다.

VRC의 친구 관계는 연인을 사귀는 형태와 유사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렘 순애는 성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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