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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나눌 수 없는 장소 [VRChat 보고서 12편]

by 심해잠수부 2023. 4. 14.
"근데 문제는 뭐냐면은, 제가 학교 다니면서 배웠던 되게 중요한 레슨 중에 하나가, 1층에 가로를 활성화하는데 그거하고 평행하게 2층 3층에다가 평행한 어떤 보행로를 만들면은 둘이 경쟁을 하게 돼서 2층이 활성화되면 1층이 죽고 1층이 활성화되면 2층이 죽는다. 결국엔 둘 다 죽는 안 좋은 현상이 생긴다. 그런 얘길 하셨어요. 그게 세운 상가의 케이스입니다."

- 한국에서 건드려선 안되는 'OO상가' 중에서 (유현준 건축가 유튜브)

 

나는 장소를 나눌 수 없는 월드를 좋아한다.

누군가는 큰 디스플레이가 있는 월드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넓은 월드를, 누군가는 어두운 월드를, 누군가는 은은한 색이 감도는 월드를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장소를 나눌 수 없는 월드를 좋아한다. 

내가 블루 룸을 선호하는 이유. 

 

장소를 나눌 수 없는 월드는 블루 룸(Single Blue Room)이 대표적이다. 

등대섬까지 합치면 장소는 두 개 아닌가요?

Single Blue Room

등대섬은 장소라고 부를 수 없다.

'아름답지만 거울 없는 월드'와 '흰색 바닥과 거울 하나가 전부인 월드' 중 선택하라면 후자의 압승이다. 거울 없는 월드는 아무리 예뻐도 빛 좋은 개살구다. 사진 찍을 때만 한 번 찾아갈 뿐, 그 뒤 다시 찾아가는 일이 없다.

VRChat에서 '장소'의 최소 조건은 '거울'이다. 

현실에선 나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의 의도와 다르게 움직이는 일이 없다. 누군가 나를 만져도 촉감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을 확인할 필요가 없다. 거울 앞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 

반면, VRChat은 트래킹이나 표정을 체크해야 한다. 트래킹이 튀어 아바타가 스크류바가 됐을 수도 있고, 상큼한 표정을 지어야 할 때 농밀한 표정을 지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타인이 뒤에서 나를 만질 때도 내게 감각이 전해지지 않으니 부끄럽거나 놀라는 반응도 해줄 수 없다. 내 몸과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거울 없이 통제할 수 없다.

누군가는 "거울만 보면서 가만히 있는 미친 게임"이라고 말하지만, 대화할 때 역동적으로 반응하려면 거울이 필요하다. 거울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 자기 미모를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타인과 현실에 있듯이 대화하기 위해서는 거울 앞으로 가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블루 룸은 "좁은 방 하나가 전부"인 월드다. 
등대섬엔 사용 불능에 가까운 거울 하나가 전부니까. 

 

장소가 잘게 부서질수록 생성된 인스턴스(Instance)는 빨리 죽는다. 

사람의 마음은 행동으로 티가 난다. 

많은 유저가 월드 인스턴스를 생성하지만, 생성된 많은 인스턴스 중 친구가 모이는 인스턴스는 정해져 있다. '중심인물'이 있는 인스턴스에 친구가 모이고 그룹이 발생하고 활발한 대화를 통해 생기가 불어넣어진다. 

사람의 마음은 행동으로 티가 난다. 

'사람'은 좋아하는 친구를 향해 움직인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싶어 하지만, 자신이 선택으로 마음이 드러난다. 누군가가 조인했을 땐 뛰어가서 인사하고 쓰다듬어주고 누군가가 조인했을 땐 가만히 있는 형태로라도 어떻게든 드러난다. 

'나'도 좋아하는 친구를 향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는 나만 좋아하는 경우가 드물다. 내가 강한 인력에 이끌려 좋아하는 친구를 향할 때, 다른 친구도 강한 인력에 이끌려 그 친구에게 빨려 들어간다. 인기 있는 사람은 블랙홀처럼 주변 사람을 빨아들인다. 인기 있는 사람은 태양이니까. 

자연스러운 일이다.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장소가 나누어질 여지가 없는 월드가 필요하다.

 

MEROOM 336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MEROOM은 세 개의 장소로 나누어진다. 거실, 침대, 욕실)

MEROOM 336号室

A, B, C, D, E가 있다. 
(그 외 평범한 구성원 5명이 더 있어 총 10명이다)

A는 중심인물로 모두의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B를 아낀다.
B는 중심인물이 아니지만 A의 편애를 받는다. 
C는 A를 엄청 좋아하지만 B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
D는 A를 재밌어하지만 C를 더 좋아한다.
E는 다른 그룹에서 놀다 지쳐 놀러 온 친구다.

B는 오늘도 습관처럼 접속해서 A의 인스턴스에 조인했지만, 오늘 현실 친구와 대판 싸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어울릴 마음이 없었다. 힘들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쉬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이 모여있는 거실을 떠나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욕실에서 멍하니 있었다.

A는 B와 얘기를 나누려고 욕실로 자리를 옮겼다. 
나머지 8명 중 3명도 중심인물 A랑 놀려고 쪼르르 따라갔다. 

(A, B가 있는) 욕실 5명.
(C, D, E가 있는) 거실 5명. 

9명이었던 거실은 4명 만큼 대화가 줄었다. 거기다 중심인물인 A가 빠졌다. 

거실은 대화 사이의 공백이 늘어났고, 덕분에 E는 텐션이 떨어져 뒤늦게 A를 따라가 몇 마디 걸어보다 피곤해져 게임을 꺼버렸다.

1명 줄어 9명.
(A, B가 있는) 욕실 5명.
(C, D가 있는) 거실 4명.

C는 A를 좋아해서 A에게 가고 싶었다. 하지만 B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니 고민을 하다 가지 않았다. 
D는 A가 더 재밌었지만 C를 좋아해서 C의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재미가 없으니 대화 텐션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머지 2명은 욕실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따라가면 "나는 C, D보다 A, B가 좋아"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듯 보일까 봐 고민만 하며 C, D의 얘기를 들으며 자리를 지켰다. 

여기서 B를 피하고 있는 C의 텐션 하락, A를 만나지 못 하고 C에게 맞춰주고 있는 D의 텐션도 하락, C, D와 얘기하는 나머지 2명의 텐션도 하락. 거실 분위기는 나빠졌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화는 하고 있지만) "심심해졌다." B가 들어오기 전 9명일 땐 재밌었는데, 이젠 대화하는 멤버도 줄었고 대화를 이끌어주는 중심인물조차 없으니까. 

거실은 태양 없어진 태양계처럼 되었다. 

거실의 4명 중 1명이 친구 잠시 보고 오겠다며 나갔다.

1명 줄어 8명.
(A, B가 있는) 욕실 5명
(C, D가 있는) 거실 3명.  

A, B가 있는 욕실은 A라는 중심인물이 있으니 여전히 재밌다. 화기애애하다. 
B는 쉬려고 했지만 A와 노는 게 재밌으니 쉬지 못 했어도 싫지 않다. 

A는 중심인물이 될 만한 자질(인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C, D도 챙겨줘야 할 거 같단 생각이 들어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A가 거실로 돌아가니 남은 4명 중 2명은 다시 쪼르르 따라갔다. 1명은 B와 대화를 하던 중이라 따라가지 않았다.

(B가 있는) 욕실 2명.
(A, C, D가 있는) 거실 6명. 

A가 왔지만 거실은 회복 불능이었다. 다만, 욕실에서 재밌게 놀던 2명도 따라왔기 때문에 겉보기엔 화기애애한 듯한 느낌이 나고 있다. 

A가 빠진 B의 욕실은 사람도 줄고 A도 없으니 텐션도 떨어졌다. 마지막 1명도 A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B에게 노골적으로 저기 가겠다고 말을 할 수 없으니 얘기를 적당히 하면서 텐션만 떨어질 뿐이었다. 

아깐 9명이 재밌게 즐기고 있던 인스턴스였는데.

 

방금 한 얘기를 나만의 억지 과민 시나리오라고 여기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내가 게임을 하면서 봐왔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어떤 월드 안에 장소가 여러 개로 구분될 만한 여지가 존재하면 두 개 이상의 장소로 분리될 때가 많았고, 분리되는 순간 장소끼리 줄다리기하는 듯한 모습이 나타난다.

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한 그룹에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그룹이 같은 월드에 모여있는 상황이 아닌 이상) 그룹의 중심인물은 한 명이다. 그리고 그룹은 중심인물을 기준으로 돌아간다. 중심이 없는 그룹은 태양 없는 태양계처럼 와해된다. 중심이 될 만한 사람이 여럿 있더라도 중심인물끼리 친하기 때문에 가장 큰 중심인물이 떠나면 다른 중심인물도 같이 떠난다.

 

물론, 새 인스턴스로 떠나는 경우도 많아 장소만의 문제는 아니다.
(장소가 하나밖에 없더라도 새 인스턴스로 아예 떠나버릴 가능성도 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새 인스턴스를 파서 데려가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노력을 해야 하므로 쉽게 행하지 못 한다."는 점이다. 결단력이 있는 사람만 (혹은 결단을 내릴 수 있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행할 수 있다. 

하지만 월드 내에 장소를 여러 개로 나누어두면 '월드를 벗어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룹을 분리하며 쪼개는 일을 쉽게 행한다. 오히려 월드를 떠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순수한 의도 혹은 아무 의도도 하지 않고 자연스레 그룹을 분리하는 일을 저지르게 된다.  

'월드를 새로 파는 행동'은 '다른 장소에 가고 싶다'는 의도가 확실한 행동이지만, 월드 내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행동은 아까 말했듯이 '쉬고 싶다는 한 사람의 작은 생각만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 

월드가 친구를 모으는 역할을 해야만 하는데, 어떤 월드는 잘 모여있는 그룹마저 쪼개고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디스코드의 채널도 다르지 않다. 

사람이 많지 않은 디스코드 서버에 (정보 공유 외의) 채널을 여러 개 만들면, 어떤 채널도 활성화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차라리 채널을 기본 채널 하나만 두고 주제 잡탕으로 뭐든 말하게 장려하는 정책이 디스코드 활성화에 훨씬 도움 된다. 북적북적한 느낌을 풍겨 재밌어 보이게 만들고 참여하고 싶게 만들기 때문에 더 좋은 효과를 낸다. 

 

나는 이러한 요소를 중요하게 여겨서, 비밀방으로 장소를 나누거나 복층으로 월드를 구성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굳이 층을 나눌 필요도 없고, 방을 많이 만들 필요도 없다. 거울 스팟을 여러 곳에 만들 이유조차 없다. 

내가 처음으로 만든 월드도 장소가 나뉘어져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월드가 좁아서 답답하다"거나 "너무 시끄러워서 시장통 같다"는 불평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월드의 크기를 늘리고 장소를 분리하지 않는 선에서 멀어지면 소리를 작아지게 만들면 된다. 칸막이를 세우고 시야에서 감추는 방법이 아니라 소리만 조금 줄여주는 형태로. 

 

참고로, 관계가 끈끈한 그룹은 장소가 잘게 쪼개어질 여지가 넘쳐나도 다들 찰싹 붙어있어 크게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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