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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여캐 아바타 남자 목소리 [VRChat 보고서 6편]

by 심해잠수부 2023. 4. 14.

나도 처음엔 똑같은 거부감을 가졌다.

다른 사람에겐 거의 말하지 않은 얘기지만, VRC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었던 날 여성 유저가 말을 걸어준 적이 있었다. VRC에서 (친구 제외하고) 두 번째로 타인과 대화한 시점이었다. 나는 VRC에서 대화하는 일조차 힘들어했던 뉴비라서, 어버버 대다 거절하지 못 하고 디코 친추까지 하고 말았다. 

그 때, 꽤 좋았다. (여자와 이런 일이 있었다며) 주변 친구에게 은근히 돌려서 자랑하는, 보편적으로 매우 꼴 보기 싫은 행동까지 저지를 정도로 좋았다. <여성 유저> 글에서 말했듯 나도 여성 유저에게 쉽게 호감을 느끼는 기분 나쁜 사람이니까. 

 

두 번째로 만난 유저가 여자였어서 그런 생각도 자연스레 하게 됐다. "남자가 여캐 아바타를 사용하고 있으면 여성 유저가 보기에 기분 나쁘지 않을까?", "여성 유저랑 접점을 가질 기회가 박살 나는 거 아닐까?" 꽤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고민은 산불처럼 옮겨붙었다. 

"남성 유저도 내가 여캐 아바타일 때 남자 목소리 내면 존나 불쾌하지 않을까?" 

"여캐 아바타를 쓰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 '실망'할 기회를 만드는 일이 아닐까? 내가 여캐 아바타인데 목소리가 남자면, 나에 대한 기대를 내 목소리가 박살 낼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과정을 매일 반복해서 겪으면 내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게 될까?"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누군가의 기대를 '내 실제 모습'으로 박살 내고 실망하는 일을 반복해서 봐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웠다. 

 

내가 온라인 친구를 오프라인에서 만나지 않는 이유는 실망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다.

'더 이상 온라인 친구를 오프라인에서 만나지 않겠다'고 공언한 뒤부터 이유를 항상 설명해왔다. 이젠 설명하는 일조차 손 아프고 지칠 정도로 꾸준히 설명해왔다. 내가 너를 만나지 않는 이유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만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서 정말 열심히 설명해왔다. 

오프라인 친구는 (내가 사고만 치지 않으면) '갑자기' 실망하진 않는다. 나에 대한 판타지가 없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싫어했을 테니까. 그래서 오프라인 친구와 만나는 일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온라인 친구는 다르다. 

나에게 호감을 느낀 온라인 친구와 실제로 만나면, 지금까지 얼마나 친했든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한다.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상상'으로 채운다. 텍스트나 보이스로만 대화하면, 보이지 않는 외모를 상상으로 채운다. 자신의 입맛대로 상상한다. 수영복 입은 사진을 가슴만 하얀 띠로 가려두면 알몸처럼 보이듯이,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상상한다.

현실에서 질뻑이 같이 생긴 사람이 연애썰을 풀면 "구라겠지ㅋㅋ" 생각하며 이야기를 보정해서 듣지만, 온라인에서 연애썰을 풀면 구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자가 준수하게 생겼을 거라고 상상한다. 회사 얘기를 그럴 듯하게 하면 능력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섹스 많이 한다고 하면 말빨이나 외모가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얘는 문제를 영리하게 해결하니까 인텔리 한 분위기겠지', '얘는 이런 성격이니까 샤프한 사람이겠지', '얘는 자주 부끄러워하니까 귀엽게 생겼겠지' 혹은 미소년 프사만 보고 얘는 미소년이겠지, 미소녀 프사만 보고 얘는 미소녀겠지 등등 상상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렇다. 

나도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상상한다.

집에서 팬티만 입고 부랄 긁으면서 이 글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물을 흘리면서 식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녹아내린 얼굴이나 머리 빠진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두운 계열의 후드만 입고 다니는 음침한 캐릭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돼지처럼 살쪘다고 멸치처럼 말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근육질은 아니어도 적당히 탄탄한 몸매를 지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연예인처럼 똥도 안 싸고 이슬만 먹겠지.

항상 그렇게 좋은 상상만 하냐고?

그렇진 않다. 

저기에 있는 내 마음에 안 드는 새끼는 질뻑이처럼 생겼을 거라고 100% 확신한다. 

인간 본능이다.

 

두려웠다. 

갑자기 태도가 바뀌는 사람을 마주하면 생각보다 마음에 스크래치가 크게 남으니까. 

그래서 남캐 아바타를 오랫동안 고민했다. 

주변 사람에게도 "남캐 아바타 해야하지 않을까?" 많이 물어봤다. 여러 친구가 말렸다. 먼저 딥다이브 하신 분은 "해보던가ㅋㅋ" (어차피 여캐 아바타로 돌아올 거라며) 가소롭다는 듯이 말한 적도 있다. 왜 그런 고민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여캐 아바타를 선택했다. 

원래는 남캐 아바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남캐 아바타도 잔뜩 찾아봤다. 하지만 부스에서 판매하는 남캐 아바타는 "전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느낌이 없었다. 남캐 아바타라고 한다면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느낌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죄다 길쭉빵빵했다. 

지금과 같은 지식을 지녔다면 애쉬처럼 남캐삘 나는 여캐 아바타를 선택하거나, 혹은 길쭉한 여캐 아바타를 예쁘게 남캐 아바타처럼 꾸몄을 거다. 하지만 그 땐 전반적으로 지식이 부족했고, 남캐 아바타를 잘 꾸밀 자신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여캐 아바타를 선택했을 뿐이다. 

혹시 그 때 만약 내 주변에 나를 남캐 아바타로 인도할 수 있는 유저가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이케맨/여미새가 되었을 수도 있다. 사람 일 모른다. 작은 분기점에서 작은 선택 하나가 달랐을 뿐인데 정반대 성향의 유저가 된 거니까. 

 

어쨌든, 여캐 아바타를 선택했다고 해서 방금까지 거북했던 광경이 거북하지 않게 될 리가 없었다. 

도저히 보이스를 켤 수가 없었다. 여캐 아바타가 남자 목소리를 내면 얼마나 싫어할까? "오히려 남자 목소리를 내야 좋아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주 당연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조언도 들었지만, 그 때의 나에게 그런 조언이 들릴 리가 없었다.

"여캐 아바타로 남자 목소리를 내면 싫어하겠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유저가 여캐 아바타로 남자 목소리 내는 일을 "내가" 존나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사람은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자동차 굴러가면 그만이지", "자동차로 사람 급수 따지는 사람 별로 없다"고 말해도, 자기 눈에 스파크 타는 사람이 인생 막장처럼 보이면 스파크 절대 탈 수 없다. 아반떼 타는 인간이 병신 같아 보이면 절대 아반떼 탈 수 없다. 자기 외모 때문에 욕 먹을까 고민하는 사람일수록 못 생긴 사람과 사귈 수 없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당할까 걱정하는 사람일수록 돈 없는 사람을 무시한다. 

고민은 사람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 때의 나는 여캐 아바타로 남자 목소리 내는 유저를 싫어했다. 나에게 아무리 잘 대해줘도 100% 남자 목소리는 싫었다. 내가 왜 귀엽지도 않은 남자 목소리를 자꾸 들어야 하지 종종 생각했다. 

내 처음을 가져가신 분도 화본에서 다시 만났을 때 보이스 켜고 말하길래 너무 당혹스러웠다. 내게 카메라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신 분도 상냥하셨지만 목소리 때문에 만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야 목소리 따위 신경 쓰지 않지만, 그 때의 나는 (남성 유저에게) 굵은 목소리보단 얇은 목소리나 귀척하는 목소리를 내주길 바랐다. 한 발 더 나아가 얇은 목소리나 귀척하는 목소리보다 묵언 유저에게 호감을 더 많이 느꼈고. 

"아니 그렇게 불쾌하면 접지 왜 계속 그러고 있냐?" 

보이스만 거북했을 뿐, VR로 가상 세계를 느끼는 과정은 재밌었다. 생각보다 몰입감이 엄청나구나. 목소리는 싫지만 아바타는 좋아서, 그리고 친구 없는 사람은 대부분 묵언이라서 친구 없는 사람 찾아서 놀면 적당히 재밌게 놀 수 있었다 극초기에는. 

이 때까지는 거의 묵언이랑 놀고 친구도 없어서 남자 목소리에 '내성'이 생기기 어려웠다. 

 

얼마 안 가 전환점이 찾아왔다.

화본에서 놀고 있었는데, 내가 뉴비인 걸 눈치채고 누군가가 찾아왔다. 내 손을 잡아끌고 이리저리 데려다주면서 설명을 해주다 자기 그룹으로 데려갔다. 

내 손을 잡아끌고 간 사람이 친절해서 나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룹을 따라다니다 보니 남자 목소리를 잔뜩 듣게 됐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질릴 정도로 듣게 됐다. 너무 많이 들었다. 디코 보이스 하듯이 얘기하는 모습을 계속 보니까, 어느 순간 여캐 아바타인 남자 목소리를 듣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우리가 바퀴벌레를 엄청 싫어하지만, 바퀴벌레를 정말 미칠 듯이 많이 보면 나중에는 신문지로 바퀴벌레를 때려잡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의 나는 개구리를 만지지 못 하지만, 어릴 때는 엄쳥 만져댔다. 그러한 환경에 익숙해서. 

롤을 처음 시작했을 땐 게임하면서 보이스 하는 일조차 부끄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디스코드 서버에서 10명씩 대화하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여캐 아바타가 남자 목소리로 말하는 일도 그렇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아무렇지 않았던 유저는 많지 않다. 

훈련소에서 "사회에서 든 물을 뺀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입대하고 훈련소를 거치지 않고 자대로 배치받으면 "의문"을 가지고, 자신의 자아를 꾸준히 꺼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훈련소에서 고생을 하고 여러 훈련을 거치면서 알게 모르게 세뇌가 된다. 사회에서 든 물이 빠진다. 그 뒤에 자대에 배치받으면 자대에서 '개인'이 아니라 일개 '병사'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VRC에 적응하는 일도 그렇다. 

처음엔 다들 평범했다. 

여러분과 똑같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단지, 폐사할 사람은 모두 폐사하고 적응한 사람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여캐 아바타의 남자 목소리가 불쾌하지 않게 들릴 때 비로소 VRC의 튜토리얼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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