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C 사진 폴더를 유심히 본 적이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찍어왔던 VRC 사진을 전부 모아왔다.
이상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지우지 않았다. 싫어하는 유저가 나온 사진이라고 지우지 않았다. 몇 번이나 지울까 고민을 했지만 나는 아직도 그대로 남겨놨다. 나를 혐오하며 차단한 녀석도, 내가 시발놈이라 생각할 정도로 개새끼인 녀석의 사진도, 전부 그대로 남아있다. 모든 흔적을 남겨놨다.
글로도 잔뜩 남겨놨고.
내 글을 읽어주는 친구가 내게 그런 말을 하곤 한다.
"네 글을 읽고 있으면, 한 명의 유저가 변하는 모습이 보인다." 네 글도 좋아하지만, 네 글에서 네가 변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느낌도 재밌다고. 변태 같은 관찰을 하고 내게 말을 전해주는 친구들이 가끔 있다. 관찰하진 않더라도 초기에 비해 사람이 점점 날카로워진다던가, 혹은 시니컬해진다던가 따위의 감상을 하는 경우도 있고.
누군가의 인스타그램을 보는 기분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인스타그램을 행복 전시하는 공간이라 생각하지만, (VRC 안 하는) 내 친구는 다른 사람의 인스타를 볼 때 업로드 '기간'을 중요시한다. 행복한 시간을 박제하는 사용자가 많기 때문에, 업로드 텀이 길면 길수록 재밌는 상상을 할 수 있다며. 여러분도 VRC 친구가 트위터에 올린 사진을 다각도에서 관찰하면 재밌을지도 모른다.
타인과 찍은 사진을 많이 올리는 이도 있고, 업로드 텀이 정말 긴 친구도 있을 테니까. 사진의 업로드 주기와 사진의 구도나 풍경을 보며 타인의 행복을 가늠할 수도 있다. 사진만 봤을 땐 그저 항상 행복해 보이는 이가 행복하지 않은 듯 보일 수도 있다 다른 각도에서 보았을 땐.
그리고, 외부로 드러내지 않은 VRC 사진 폴더를 다시 볼 때도 많은 요소를 관찰할 수 있다.
연말에 스팀에서 제공하는 플레이타임 통계를 보면 내가 VRC를 얼마나 재밌게 했는지 알 수 있다. 내가 그 달에 게임을 재밌게 했는지, 재미없게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연말의 플레이타임 통계를 보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다. VRC에서 내가 찍은 사진의 수와 나의 플레이타임이 비례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내가 사진을 많이 남겼을수록 내가 재밌게 보냈다는 의미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외의 다양한 요소도 관찰할 수 있다.
뉴비 때는 사진에 공을 들이지 않고,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에만 집중한 사진이 많았다. 사진을 남긴다는 행위보다 시간을 박제한다는 느낌의 사진이 많았다. 친구와 어울리며 친구가 잔뜩 나오는, 친구를 잔뜩 담은 사진들이 많았다.
하지만 게임하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타인과 찍은 사진은 거의 둘만 찍은 사진만 남게 됐다. 단체 사진은 사라지고, 나 혼자만을 찍는 사진과 둘만 찍는 사진만이 남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플레이하고 어떻게 생활했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사진 속에 전부 드러나고 있었다.
요즈음의 내가 바라보는 VRC는 예전과 확실히 다르다.
나는 닳고 닳아 더 이상 어떠한 재미도 제대로 느끼지 못 한 채, 접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맞딱뜨린 듯 보인다. 도파민을 얻기 위해 접속할 뿐, 예전 같은 두근대는 마음 따윈 하나도 없다. 데이터 쪼가리를 뒤집어쓴 친구에게 진지하게 마음을 태우던 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뻔하디 뻔하다 생각하며, 기대하지 않고 타인을 대하는 나.
그리고 사진을 보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 흐름이 보인다.
어릴 때부터 나이 들 때까지의 사진을 모아보듯이 한 유저의 일생을 보는 듯하다.
어릴 땐 마냥 밝게 웃는 짜리몽땅 친구의 밝은 모습이, 중학생과 고등학생을 거쳐 허세 가득하지만 뚱한 표정으로 지내는 모습으로, 그리고 계곡에 가서 같이 놀아도 억지로 웃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어느 순간부터 추억은 사라진 채 나를 증명하기 위한 사진만 남아버린 나처럼, VRC의 사진에서도 나란 유저가 썩어가는 흐름이 보인다.
여러분의 사진은 지금도 즐거운 듯 웃고 있을까?
좋아하는 친구 옆에서 얼굴 방긋 웃은 채 사진 찍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트위터에 업로드 할 사진만 찍고 있을까.
아니면 그 사진조차도 이젠 찍지 않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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