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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녹아가는 시간 [VRChat 보고서 100편]

by 심해잠수부 2025. 2. 8.

꾸준히 할수록 시간이 많이 녹는다.

게임이 됐든 취미가 됐든, 공부를 취미로 하든 뭐가 됐든 간에 꾸준히 하는 만큼 시간이 녹는다. 내가 롤에 썼던 시간이 얼마나 될까. (옛날엔 게임이 길었으니까) 한 판 40분 잡고 2천 판을 돌렸다고 생각해도 1300시간이다. 내가 문명6을 한 시간이 1000시간. 문명5를 했던 시간은?

사람 만나는 취미도 없고 쉴 때는 게임밖에 안 하니까 그리 많다고 볼 수는 없다.

자기 할 일만 제대로 하고 있다면 게임 중독이라고 보긴 어렵다.

여가 시간에 게임을 하는 게 잘못됐다고 볼 수는 없으니까. 퇴근하고 매일 새벽까지 게임을 한다고 해도 문제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 현생을 살지 않는다 말할 수는 없다. 가끔씩 게임 한 판 때문에 지각을 하더라도 가끔은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게임 중독이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집에만 박혀 히키코모리처럼 지내는 이를 게임 중독이라고 보긴 어렵다. 게임을 하기 위해 집에만 박혀 지내는 게 아니라, 박혀있기 때문에 방 안에서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 수단으로 게임을 찾는 거니까.

포인트는, '게임 때문에' 삶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느냐.

근데, 과연 그 기준이 옳을까?

 

삶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느냐로 내 삶을 따진다면 나는 VRC 중독이라고 보긴 어렵다.

거의 매일 VRC를 하고, 매우 긴 시간 동안 할 때도 많지만, 출근도 하고, 집도 너무 더럽지 않게 적당히 잘 치우며 살고 있다. 내 친구들은 알겠지만, 딱히 그리 많이 하지도 않는다. 길게 할 때야 길게 하는데, 단체로 노가리 까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들어가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금방 끄는 경우가 엄청 많다.

근데, 다른 게임과 다른 찝찝한 느낌이 있다.

너무 많이 녹는 시간 때문에.

 

문명6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플레이 타임 1천 시간이 안 된다.

브얄은 열심히 했다는 느낌이 없는데도 벌써 5천 시간이 넘었다.

2천 시간까지는 확실히 내가 열심히 해서 그럴 수 있는데, 2천 시간부터는 그렇게 재밌게 하지도 않았고 열심히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5천 시간이 됐다. 거기다 2천 시간 전에는 PC 접속도 껴있던 반면 2천 시간부터는 PC 접속이 총 3시간이 안 될 텐데.

6시 퇴근인 사람이 밥 먹고 저녁 10시에 들어와 새벽 1시에 끈다면, 1년에 1천 시간 정도 된다. 저녁 7시에 들어와 새벽 1시에 끈다면, 두 배일 테니까 2천 시간 정도 된다. 평일 제외하고 주말에 토일 합쳐 20시간 정도를 1년 꾸준히 한다면 또 1000시간 정도 된다.

내가 매일 꾸준히 3시간씩 하고 주말에 20시간씩 박는 유저처럼 게임을 했단 말인가?


재밌자고 한 게임에 자기가 들인 시간을 후회하는 모습을, 나는 불쾌하게 여긴다.

생산성이 없는 무언가에 시간을 버렸다는 듯 후회하는 모습이 바보 같다. 재밌었으면 된 건데, 뭘 그리 시간을 아까워하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다른 쓸데없는 행동으로 시간 버렸을 거면서. 인생을 비효율적으로 살면서 게임에만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는 모습을 보기 싫다. 생산성이 없는 취미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모습을 보기 싫다.

내가 아무리 시간을 많이 버렸어도 나는 VRC를 한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롤도 그렇고, 문명도 그렇고 내가 즐겨왔던 모든 게임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 삶을 망친 적이 있더라도, 그로 인해 내가 인생의 중대한 비용을 버려왔다 해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생산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게임한 시간을 미워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요즈음엔 이상한 생각이 든다.

VRC는 게임이라기보다, 아바타가 보이는 디스코드 통화방이다.

게임이라고 말하기엔 애매한 요소가 있다.

게임은 게임을 하는 시간 동안 게임에 집중하고 재밌다. 게임을 하기 위해 게임을 켰다고 볼 수 있다. 반면, VRC는 게임을 하고 싶다기보다 외로워서 켜는 느낌이 있다. 예쁜 미소녀 아바타 구경하며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기보다, 그저 외로워서 아바타가 보이는 디스코드 통화방에 자꾸만 들어가는 기분이다.

마작을 좋아해서 작혼에 접속한 게 아니라, 할 게 없어 마지 못 해 작혼에서 마작을 치는 기분.

나는 통화방에서 시간 녹이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친구와의 술자리 같아서.

나는 친구와의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술자리에서 대화를 하며 떠드는 일을 좋아한다면 게임하듯 좋아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러한 성격이 아니다. 우리 엄마처럼 통화로 수다 떨며 시간을 보내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할 말도 없고 용건도 없으면서, 아무 얘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느낌이 싫다.

 

그러니까,

나는 게임을 하면서 즐거웠나?

 

친구들끼리 만나는 일이 딱히 재밌지가 않아 현실의 술자리를 잘 가지 않는데, VRC도 그와 똑같지 않았나? 재미가 아니라 무언가에 붙잡혀 질질 끌려가듯이 하고 있진 않았나? '심심할 때' 시간 죽이고 싶어서 켰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좋아하는 사람 보고 싶어 켰으면 다행이지, 아무 목적도 없이 들어와 얘기할 땐 얘기하고 게임할 땐 게임하면서, 그저 목적 없이 들어와 시간만 버리다 접속을 종료하지 않았나?

그저 게임에서 뭔가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을까 그저 시간만 보내고 있지 않았나?

이건,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마치 제 2의 인생을 사는 기분.

퇴근하고 집에 와 심심하지만 시간은 흐르기에 멀뚱멀뚱 유튜브 보고 넷플릭스 보고 게임하듯, VRC에 접속하지만 시간은 흐르기에 친구 인스턴스만 조인하며 돌아다니기만 할 뿐인 삶. 현생에서 할 게 없어 VRC에 들어왔지만 VRC에서도 할 게 없는 무료함의 마트료시카.

 

예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다른 게임은 게임의 목적이 명확하지만 VRC는 그렇지 않다고.

반대로 말하면, 게임의 목적이 없는 채 VRC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게임처럼 나의 목적을 명확히 하고 플레이해야 후회가 남지 않을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관성적으로 접속하며 게임으로 소비하지 못 한 채 시간만 버리고 있을 수도 있다. 유저에 따라서는.

중독처럼, 습관적으로 게임을 켜고 있을 수 있다.

 

사람은 '반복'적으로 행동해서 본능을 거스를 수 있는 습관을 만들 수 있다.

공부하는 게 정말 귀찮지만, 특정 시간에 2시간씩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면 귀찮아도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고 과학자들이 그러더라. 나는 안 되지만). 유사한 이유로 치킨을 먹을 때 맥주를 먹는 걸 당연시 여기는 순간, (서로 관계없는데도 학습의 결과로 술이 생각나는 거니까) 중독의 위험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같은 이유로, 퇴근 후 브얄하는 게 루틴이 됐으면 중독과 다를 바 없을 수 있다.

내가 원해서 한 건가? 그저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친구들과 놀고 싶어 친구가 가장 많은 시간대인 오후 10시에 게임을 켰던 이가, 어느 순간부터 친구가 들어오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오후 10시에 브얄 시간이라며 게임을 켜고 있다면 중독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오후 10시와 내가 VRC를 하는 건 아무 연관성이 없는데도 학습의 결과로 연관성이 생긴 거니까.

내가 하고 싶어서 게임을 하고 있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겠지만, 그저 친구들이 많을 때 브얄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나 친구들이 들어오는 시간 혹은 내가 퇴근한 시간에 할 마음이 없어도 자꾸만 습관적으로 켜고 있다면,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에 게임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그렇게 내가 게임을 하고 있다면, 나는 그 시간이 너무나 아깝게 느껴진다.

시간이 녹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을 때 켜야만 하는데, 쉽지 않다.

좋아하는 친구가 있을 때 (같이 못 놀아도) 켜야 하고, 오후 10시에 사람이 많으니 (같이 못 어울려도) 켜야 하고, 퇴근 후 바로 들어가야 친구들이 많으니 (같이 못 놀아도) 습관적으로 퇴근하자 마자 켜고 있다. 어떠한 그림자를 쫓다 보면,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날 맞이하고 있다.

오늘은 존나 피곤하고 졸리고 자야 하는데, 퇴근했으니 브얄 켜야지.

들어가도 딱히 재미도 없고 조는 둥 마는 둥 게임하고 끌 거면서.

그 시간에 차라리 푹 자고 일어나서 사람 없을 때 하는 게 훨씬 더 재밌을 수도 있는데.

 

디스코드에서 다른 게임하며 VRC 유기하듯 게임하는 친구들이 훨씬 건전한 브생을 사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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