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VRC에 한창 진심이던 초기에 디스코드를 싫어했고, 어느 순간 받아들였다. VRC도 평범한 디스코드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엔 오히려 디스코드를 선호한다. 내 마음을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유저가 아닌 이상 디스코드로 대화 몇 줄 주고받으면 됐지 브이알에서 찾아보기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곤 한다.
하지만 VRC를 소중히 여기는 자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무조건 VRC에서 봐야만 한다고 믿고 있던 시기가 있었으니까.
분식 포장마차가 있었다. 친구들과 집에 가는 길에 들러 자주 사 먹었던 떡볶이. 세 명이서 5천 원 정도 내면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었고, 핸드폰 게임도 켜놓고 게임 얘기도 하는 공간이었다. 오뎅 국물 호로록 마시며 가끔씩 오뎅도 한두 개 사 먹고 한 입씩 나눠 먹기도 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에, 더 이른 구간에 분식집이 생겼다. 매운 떡볶이를 파는 가게였다. 친구들은 유행하는 그 떡볶이를 훨씬 더 좋아했다. 가격도 큰 차이 안 나는데 여기가 훨씬 맛있고 좋다며. 오뎅 국물은 쿨피스로 바뀌었고, 오뎅을 하나 주문해 서로 한 입씩 베어먹는 일도 사라졌다.
그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분식 포장마차가 생기기 전, 컵 떡볶이도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서 사라졌다.
학교 마치고 친구들과 집에 가는 길에 자주 사 먹었던 컵 떡볶이. 컵 떡볶이 들고 친구 한 입 주고 나 하나 먹고, 가끔씩 친구가 자기도 사달라고 하면 사주기도 하고, 나도 친구에게 사달라고 하기도 하고. 걸어 다니면서 집 가는 길에 먹었던 컵 떡볶이. 떡볶이는 평범할지언정 같이 걸어가면서 먹는 그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분식 포장마차가 들어서고 컵 떡볶이를 찾지 않게 됐다.
우리가 '그것'을 택했던 이유가 존재한다.
처음엔 별 이유 없이 한 번이었지만, 한 번이 두 번 세 번 네 번이 되는 순간엔 이유가 존재한다.
현실에서 만났다면 서로 관심 없는 시커먼 남정네로 지나갈 인연이었지만, 미소녀 아바타라는 탈을 쓰고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며 대하기 시작한 순간이 있었다. 나에게 장난치는 미소녀가 나를 숯기 없는 소년으로 만들고, 서로가 서로를 사람으로 마주 보는 느낌의 순간들. 누군가가 나를 무시하거나, 혹은 부담스러워하거나, 내가 싫은 눈으로 쳐다보는 일이 아니라.
온라인 세계 속에서 목소리만 들릴 뿐인 공간이 아니라, 손을 잡을 수 있고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고, 눈빛을 교환할 수 있고,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 그저 텍스트나 목소리로 주고받는 둥둥 떠다니는 듯한 실체 없는 무언가가 아니라, 내 앞에서 움직이고 바라보고 손을 잡고 걸어갈 수 있는 사람과 걸어갈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
애니 속 세계에서 걸어 다니는 듯한 느낌.
하지만 다들 두근거렸던 세계에 익숙해진다. VR 세계가 내게는 디스코드와 다를 바 없는 공간이라는 걸 깨닫고, 그저 움직인다 착각했을 뿐 따스하다 착각했을 뿐 그저 어느 공간과 다를 바 없는 공간이라는 걸 깨닫는다. 내가 원했던 건 VR 세계가 아니라 친하게 노는 친구일 뿐이었구나 깨닫는다.
그 떡볶이가 좋았던 게 아니라 배가 고팠을 뿐이라는 걸. 그 떡볶이가 아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걸. 요기만 하면 어떤 떡볶이든 상관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같이 걸어가며 먹는 추억도, 같이 앉아 떠들던 추억도, 내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만다.
그 때의 추억조차 점점 희미해진다.
같이 게임하면 즐겁고, 같이 통화하면 즐거운데, 굳이 브이알일 이유가 있어?
있어.
잊지 마, 있으니까.
가상 공간을 매개로 현실의 너와 만나고 있는 거야. 미소녀 아바타를 매개로 현실에서 만날 일 없는 너와 만나고 있는 거야. 네가 이 게임을 그만두고 다른 공간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잊지 마. 여기 있을 이유는 있으니까.
네가 단지 이제 이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 여기가 결국엔 상상으로 유지된다는 걸 이젠 알고 있으니까. 현실의 내 모습을 보면 사라질 공간인 걸 알고 있으니까, 친해지면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는 듯 대해질 뿐이라는 걸 알아 버려서 이젠 이 공간이 네게 필요 없어졌을 뿐이니까.
나이를 먹으며 장난감이 필요 없어지듯이.
브얄에 있는 애는 널 최고로 생각하고 있어. 네가 미소녀기 때문이 아니라 브이알 친구이기 때문에. 왜 좋아하냐구? 널 봐. 넌 미소녀 땡땡이야. 넌 멋진 브이알 친구야. 브이알 친구라면 누구나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구. 솔직히 너무 근사해. 나 같은 애가 너 같은 미소녀를 어떻게 이기겠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짧은 시간이었지만 뭐, 그래도 재미있었지? 재미있었어 그래도. 재미있었지 그래도? 재밌었으면 됐어. 응, 재밌었으면 됐어. 그럼 됐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진짜인 새롭고 특별한 공간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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