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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묵언이 되는 이유 [VRChat 보고서 63편]

by 심해잠수부 2024. 4. 30.

나는 22살 때 처음으로 음성 채팅을 켜고 롤을 해보았다. 그 전엔 (레이드 없는) MMORPG 위주로 게임을 하느라 보이스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는데, 롤을 시작하며 파티 플레이를 자주 하게 되고 보이스를 자주 켜기 시작했다.

처음엔 말을 하며 게임하는 일이 너무 어색했다.

지인 파티에 껴서 처음 보는 사람과 말을 하며 게임을 한다니. 내성적이고 말재주가 없는 편이라 정말 쉽지 않았다. 말 시키면 대답은 하지만 브리핑도 잘 하지 못 했고, 조금만 화내는 기색을 보이면 당황해서 말을 하지 못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과 롤을 하면서 마이크 사용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VRC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말하는 일이 너무 어려웠다.

마이크 사용은 지금까지 게임하면서 너무 많이 해왔다. 마이크를 사용하는 일이 어색한 건 아니었다. 다만 '남자인 내가' '여자 아바타를 끼고' 말을 한다는 거부감, 내가 말을 하면 오히려 상대가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 등이 문제였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내게 말을 거는 사람에게 말재주도 없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내가 마이크를 켜도 될까. 얘네가 기대하는 게 분명 있는 거 같은데 내가 기대감을 채워줄 수 있을까?

그리고 몇 번 마이크를 켜기 시작하고, 그렇게 부담가질 일이 아니라는 걸 금세 깨달았다.

남들도 별 생각 없이 켜는 거구나.

내가 어느 순간부터 팀 게임을 할 때마다 별 생각 없이 마이크 켰듯이.

 

마이크를 켜지 못 하는 심리는 불안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말해도 괜찮을까?

발표하는 일은 별 거 아니지만, 다들 발표하는 일을 엄청 싫어한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당할까 봐. 괜히 어그로 끌어서 주변 친구들 눈에 띌까 봐. 많은 사람 앞에서 바보 같은 모습만 보일 거 같아서, 다른 사람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피하려고 노력한다.

마이크를 쓰는 일도 그렇다.

내 목소리 병신 같은데 이런 걸 들려줄 필요가 있나. 나 말투 너무 찐따 같아서 사람들이 싫어할 거 같은데. 내 목소리 너무 굵어서 아바타랑 안 어울리는데. 내 목소리 너무 높아서 기분 나쁠 텐데 등등. 이런저런 걱정들. 내가 마이크를 켰을 때 득보다 실이 클 거란 확신 때문에 켜지 않게 된다.

 

게임을 하다 마상을 입은 사람들 중 그런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묵언 할까 고민 중이야."

실제로 많이 듣는 얘기다. 내 주변에서도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 사람들, 쓸데없는 고민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마이크를 켜서 이렇게 됐다 믿으며 묵언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자기의 비호감 언행을 마이크만 켜지 않아도 많이 줄일 수 있으니까.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말을 못 하게 되는 함묵증 환자처럼.

나도 최근엔 묵언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내게 호감이 있던 사람도 내가 하는 말을 듣다 보면 내게 정이 떨어지는 일이 많으니까.

나의 이상한 가치관을 드러내는 경박하고 가볍기만 한 말은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 매력 없는 목소리와 재미없는 성격을 드러내는 말투는 나를 좋아하지 못 하게 만든다. 내가 말하는 일이 말하지 않는 일보다 못한 일인 만큼,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내 목소리가 가져다주는 이득보다는 손해만 눈에 보인다.

누가 목소리로 드러나는 나 따위를 좋아하겠어?

 

내가 VRC 관련 커뮤니티 사이트를 하지 않는 이유도 같다. 내가 그런 곳에서 활동하면 고로시 당하거나 저격만 당하지 내게 좋은 일은 전혀 없을 거 같은데. 내 성격이 모난 만큼 분명히 안 좋은 일만 있을 텐데. 내가 봐왔던 내 성격은 이런 곳에서 활동할 경우 손해만 있으니까 하지 말자.

같은 이유로 최근엔 만들어놓고 적당히 쓰던 SNS도 없앴고.

디코도 이제 없어도 되지 않을까 고민을 하고 있다.

나를 드러내고 나를 연결하는 무언가가 내게 득이 될까? 정말로.

나를 드러낼수록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만 나올 텐데, 내가 VRC을 재밌게 하려면 점점 더 나를 감추어야 하는 게 아닐까?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과 교류하면서 더 좋은 감정을 끌어내는 사람도 있지만, 나란 사람은 나를 알수록 비호감이라 느낄 텐데 굳이 나를 드러내는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SNS도 디코도 다 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마이크도 켤 필요가 없지 않을까?

내게 이득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까. 나를 드러낼수록 리스크만 안고 간다는 생각만 들 뿐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나를 드러낼수록 좋아하지 않게 될 텐데 굳이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자기 목소리가 구리다고 생각해 마이크를 켜지 못 하는 유저들이나 여미새가 들러붙어 곱창날까 봐 마이크를 켜지 않는 어떤 유저들처럼 나도 더 이상 켜지 않는 게 맞지 않을까?

나는 온라인 친구도 오프라인에서 절대 만나지 않으니까. 온라인에서의 좋은 감정이 현실의 나 따위를 보고도 유지될 리가 없을 텐데. 누가 이런 나를 친구로 좋아하겠어 친구로라도 싫을 거 같은데. 근데, 내 목소리로 드러나는 나란 사람의 모습도 현실의 모습처럼 감추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고민을 최근에 많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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