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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만나지 않으면 관계는 사라진다 [VRChat 보고서 78편]

by 심해잠수부 2024. 9. 23.

간혹 누군가는 과몰입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아도 과몰입이 유지될 거라고 착각하곤 한다.

 

예전에 말했듯, 과몰입이 끝나는 순간은 누군가가 '내가 이러려고 과몰입 하는 거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을 때다.

그 생각을 가장 많이 할 때가 언제일까?

콜라 한 잔 했다가 용 승천하는 소리 냈을 때? 마이크 켜져 있는데 꺼진 줄 알고 코 풀었을 때? 브수면 하는데 옆에서 탱크 지나갈 때? 내 생일에 축하 안 해줬을 때? 발렌타인 초코 안 챙겨줬을 때?

그 생각을 가장 많이 할 때가 언제일까?

내가 과몰입에서 원하는 감정을 얻지 못 할 때겠지.

원하는 감정을 얻기 힘든 순간이 언제일까?

내게 감정이 식어서 더 이상 상냥하지 않을 때,
그리고 나와 같이 있지 않을 때다.

<VRChat 보고서 77편: 친구가 나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안 만날까?>에서 말했듯이, 제육은 떡볶이랑 찐하게 노는 동안에도 도망가지 않지만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선택해서 열심히 놀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옆에서 사라져 있다. 내가 다시 그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도 그의 마음은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 뒤늦게 수습하려고 해봐야 이미 떠난 마음 되돌릴 수 없다.

 

만족할 만큼 시간을 함께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점점 떠나갈 수밖에 없다.

내가 과몰입과 헤어졌을 때의 상황도 그랬다.

어떠한 이유 때문에 같이 시간을 보내기 어려웠는데, 가끔씩 만나도 이러저러한 일로 예상 일정보다 먼저 가는 일이 많았다. 거기까진 이해해 줄 수 있지만, 게임하는 동안 외부에서 자꾸만 리퀘 보내는 친구를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는 어필을 내게 하거나 내가 있는데도 그룹 친구들과 열심히 붙어 얘기하기 바쁜 모습을 보다 '이건 아닌 거 같다' 생각해 마음을 거두었다.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일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거 같았으니까.

 

친구라고 다를 바 없다.

나는 과몰입이 생긴 친구와 사이가 멀어진 일이 꽤나 많다.

과몰입이 생긴 친구는 항상 과몰입과 붙어있는데, 프빗 안 가고 초록불 프플방에서 같이 붙어있어 봐야 알 수 없는 분위기 때문에 같이 있기가 힘들다. 걔는 과몰입이 항상 최우선이라 내게 많은 신경을 써주지도 못 한다.

초록불 2인 인스턴스라서 굳이 찾아가지 않다 보면, 어느 순간 관계는 무너져있다.

자기가 과몰입이랑 맨날 붙어있느라 내가 자주 찾아가지 않았을 뿐인데, 내가 자길 자주 찾아오지 않는 이유로 멀어져 있곤 했다. 내가 주황불이라 그가 찾아올 수 있는 시간, 찾아가고 싶은 시간에 만나지 못 하는 경우가 꽤나 있었거든. 그 전에는 내가 주황불이어도 내가 상대를 직접 자주 찾아가서 만났지만, 상대가 과몰입을 시작한 뒤부터는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만나지 않는 시간이 늘어나며 서로가 서로를 멀리하는 일이 늘어났다.

 

친구가 나를 여전히 좋아한다고 해도, 내가 친구를 여전히 좋아한다고 해도, 만나지 않는 시간이 늘어나면 관계는 점점 멀어진다. 특히 둘 중 한 명이 상대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클수록 엔딩까지 도달하는 속도는 빨라진다. 과몰입 같은 관계라면 더욱 더 빠를 수밖에 없다.

"만나지 않아도 이해한다, 만나지 않아도 괜찮다, 만나지 않아도 좋아한다" 따위의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시간을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괜찮다. 하지만 둘 중 한 명이라도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바빠도 이해한다는 말 따위는 성립하지 않는다. 네 환경 네 여건 이해한다며 오래 산 부부처럼 의무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어른 같은 모습으로 상대를 배려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일 따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무조건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써야만 한다.

VRC에서 보길 바라는 사람에겐 VRC에서 시간을 써야 하고, 디코에서 봐도 괜찮은 사람에겐 디코에서라도 시간을 써야만 한다. 진짜 현실에서 만나길 바라는 사람에겐 현실에서 시간을 써야 할 수도 있다. 현실이란 공간에서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VRC에서 아무리 시간을 써봐야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VRC에서 보는 걸 원치 않고 디코에서 보길 바라는 이는 당연히 VRC가 아니라 디코에서 봐야 하고. VRC나 디코, 현실 같은 공간이 아니라 '같이 하는 게임'이란 공간이라면(칼바람이나 소환사의 협곡이라면) 그 게임에서일 테고.

장소의 기준은 각자 다르겠지만, 어떤 장소가 됐건 상대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공간"에서, "상대가 만족할 만큼 시간을 써줄 수 있어야만" 관계가 무너지지 않는다. 의무적인 관계도 괜찮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해서 정말로 과몰입을 오래 보지 않아도 유지될 거라 착각하며 유기하고 지내면 안 된다.

어떤 누군가들이 그렇게 좋아하던 과몰입에게 까이듯이 헤어지게 된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지 않을까. VRC를 하지 않고 디코에서 친구들이랑 꾸준히 게임이나 하고, 게임 즐길 거 다 즐기고, 할 일 다 끝내고, 공부할 거 다 하고, 정말 할 거 없는 시간에만 들어갔기 때문이지 않을까.

77편에서 말했듯, 내가 상대를 좋아한다 해도 그들은 내 마음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

'만나지 않아도 여전히 좋아한다'는 얘기만 듣고 '그래, 나는 그들을 여전히 좋아해. 그들이 섭섭해하는 게 이상해.'라고 생각한 유저도 있겠지만, 77편은 친구 관계로 우울해하는 사람에게 쓸데없는 삽질하며 우울해할 정도의 일은 아니라는 의미가 강한 글이었다. 누군가의 변명이나 합리화의 이유로 쓰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무리 좋아하는 마음이 진심이어도 상대는 마음을 몰라준다.

원하는 공간에서 충분히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내 마음을 몰라준다.

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으니 내가 얼굴을 안 비춰도 괜찮아지는 게 아니다. 세상 어딘가에선 VRC에서 멀쩡히 잘 만나면서도 내가 자기랑 마작을 안 해준다고, 자기랑 헬다이버즈를 안 해준다고, 팰 월드를 안 해준다며 거리를 두는 친구도 있다. 네가 외눈박이 마을에서 두 눈을 가진 정상인이라고 아무리 말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니,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며 상대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내 마음이 그렇게 보였나 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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