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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내가 다시는 접속하지 않을 그 날 [VRChat 보고서 92편]

by 심해잠수부 2025. 2. 2.

나는 내 현생에 불만이 많다.

원인이야 많지만 이유를 요약하면, 세상이 내게 상냥하지도 않고, 내가 원하는 사람과 따듯하고 질척거리는 감정을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적으로도 외롭고 성적으로도 외롭기 때문이다.

관계적 판타지도 성적 판타지도 해소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타인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잘난 삶도 아니며, 노력하면 나아질 거라 믿으며 시지프처럼 세상에 투쟁하는 긍정론자도, 켄드릭 라마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내 초기 VRC 보고서를 기억하는 독자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현생에서 충족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니까 게임에 빠진다. 원하는 경험과 감정을 현생에서 모두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VRC 안 한다. 하지만 원하는 무언가를 현생에서 절대 채울 수 없는 사람도 있다. 현실에서 충족하지 못 한 관계 욕구를 게임에서 풀어도 이상하다고 할 수 없다.

<VRChat 보고서 7편: 심해어>

 

다른 공간에서도 똑같은 얘길 했었다.

내가 VRChat을 재밌게 즐기면 즐길수록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 했던 걸 게임에서 즐기고 있을 뿐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나를 휘감는다. 내가 잘났다면 내가 저 새끼처럼 잘 생겼다면 저 새끼처럼 돈이 엄청 많았다면 내가 조금만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내가 지금 즐기고 있는 컨텐츠를 오프라인에서 다른 사람과 더욱 쩌는 느낌으로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실제 세계에서 풀트가 공짜인데도 제대로 즐기지도 못 하며 재미를 모두 놓친 채로 살다가, 가상 세계에서 매달리고 있다니.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내가 가상 세계에 재미를 못 느꼈을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이미 잔뜩 하고 있는 걸 내가 굳이 게임에서 불편한 장비 끼고 죽자사자 할 이유가 없으니까. 춤 추고 싶으면 풀트를 낄 게 아니라 싶으면 클럽을 가면 되고, 현실에서 누군가와 자고 싶다면 애인이랑 말 그대로의 동침을 하면 되는데.

그걸 못 해서.

그걸 못 해서 가상 세계에서 재미를 느낀다는 게.

나도 현실 풀트 즐기고 싶었어.

<공짜 풀 트래킹>

 

최근에 사귀었던 친구가 자기가 VRC를 하는 이유도 외로움 때문이라고 그랬다.

여자 친구와 오래 사귀는 동안 외롭다는 감각을 모르고 살아가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 외로웠는데 VRC에서 타인과 교류하며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고 VRC가 좋다고 그러더라.

아닌 유저도 많겠지만, 정말 많은 유저가 외로워서 VRC에서 나갈 수 없는 거 같다 느낀다.

불나방처럼 과몰입을 하고 헤어지고 타인에게 실망하고 관계가 파탄이 나도 VRC에 다시 기어들어 오는 이유는, 내 마음이 편히 쉴 공간이 없기 때문에. 가족과 같이 살 때에도 나는 내가 편히 있을 만한 공간이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디스코드 켜고 친구끼리 떠들며 게임할 때도 느껴본 적 없다.

내가 원하는 감정을 정말 작더라도 어쨌든 얻어갈 수 있는 공간이 VRC였다.

VRC를 환상향처럼 여기던 기대 가득한 뉴비 시절뿐만 아니라, 닳을 대로 닳아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썩은 물의 지금도 다르지 않다. VRC을 끊지 못 하고 접속하고 껐던 오늘도 처음과 다르지 않다. 게임에 접속하는 일이 기대됐던 그 때도, 더 이상 게임에 기대하지 않는 지금도, 내가 원하는 감정을 정말 쪼끔이라도 쪼끔이라도 얻어갈 수 있는 공간은 VRC 뿐이었다.


설날에 바빴다. 친구와 같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바빴다. 누군가가 1박 이상 집에 머물고 간 일은 9년 만이었다. 밥 먹고 잠 자고 얘기 조금 하는 게 전부였지만, 생각보다 같이 있는 시간이 편해서 좋았다.

그래서 VRC을 하지 않았다.

나는 매일 짧게라도 VRC에 접속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3일 동안 접속해야겠단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친구 옆에서 VRC 해도 상관없었는데, 굳이 하지 않았다. VRC를 해야 할 정도로 부족하다(접속하고 싶다)는 느낌을 받지 못 했다.

외롭지 않으니 접속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친구가 돌아간 뒤, 나는 디스코드 음성 채널도 다시 돌아다니고 VRC에도 접속했다.

 

유저마다 편차는 있다.

내 VRC 친구들 중 디스코드 통화에 만족해 VRC를 유기하는 친구도 상당수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디스코드 서버에서의 단체 통화로 미묘한 관계 욕구를 해소할 수 없었다. VRC를 접하기 전부터 온라인 친구들과 매일을 디스코드 음성 채널에서 시간을 녹여왔는데도.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면, 찐따 남자 그룹 특유의 분위기가 싫었을 수도 있다. 사회성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친구들이 모여, 재미는 있지만 은근히 서로에게 말을 띠껍게 해 내가 상냥한 느낌을 받지 못 해 만족하지 못 했을 수도 있다. 이유는 모른다. 아마도 친구 관계를 넘어서야만 얻을 수 있는 감정 때문에 그런 거 같지만.

디스코드 서버에서 충족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VRC에서만 해소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데, VRC에서만 얻을 수 있는 무언가는 현생에서 더 진짜에 가까운 완벽한 모습으로 얻을 수 있다.

 

나는 현생에서 얻을 수 없는 감정이니까 영원히 VRC에 질질 끌려다니며 살겠지만, VRC가 망하더라도 그와 유사한 무언가에서 시간을 녹이며 살아가겠지만, 내 할아버지가 생을 마감했던 나이가 되어서도 지금의 우리 아빠 나이가 되어서도 나는 브붕이로 살아가겠지만, 혹여나 내가 VRC를 그만하게 된다면, 내가 죽었거나, 정말 운 좋게 현생에서 지속 가능한 만족 관계를 형성했을 때라고 나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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