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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과몰입과 친구 그룹 [VRChat 보고서 10편]

by 심해잠수부 2023. 4. 14.

친구 그룹에서 과몰입과 어울릴 생각이라면 과몰입 선언을 해야 한다. 
과몰입 선언이 싫다면, 친구 그룹에서 같이 어울릴 생각은 접어야 한다.

무조건.

다른 선택지는 없다.

 

현생에서의 연애는 서로를 향한 시간이다. 둘의 시간이다. 

연인이 친구와 놀더라도 내가 같이 섞여 어울릴 일은 많지 않다. 인사 정도는 시킬 수 있다. 여행 정도야 같이 갈 수 있다. 가끔 만나서 같이 술을 할 수야 있다. 하지만 날마다 친구와 섞여 어울리진 않는다.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있고, 연인과 보내는 시간이 있다. 

연인과 시간을 보내느라 친구와 만나는 일이 줄어도 괜찮다. 친구 그룹에 '종속'됐다고 할 만한 수준으로 엮이지는 않으니까. 만나봐야 술이고, 못 나가도 그런갑다 해준다. 단톡에 얼굴이나 비추고 가끔 시간 날 때 술이나 같이 마시면 결혼하지 않은 친구끼리 언제까지나 친하게 지낼 수 있다. 

 

VRC의 과몰입도 당연히 서로를 향한 시간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VRC는 현생과 다르다. 

가족, 학교, 회사 등 있어야 할 여러 종류의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한 유저가 존재하는 공간도 아니고, 다양한 유저를 만날 시간과 장소가 주어지는 공간도 아니다. 자기가 머물고 있는 하루 4시간짜리 친구 그룹 하나가 전부다. 

서로에게 자유로운 친구 관계가 형성되기 어렵다. 

서로가 서로에게 드러낸다. 

마이너한 게임을 스트리밍 할 때 시청자가 보이는 모습을.
디스코드 보이스 채널에서 게임을 할 때 친구가 보이는 모습을. 

"시참 안 하시나요? 같이 게임하시죠."
"너희 겜 하냐? 나도 같이 하자." 

마이너한 게임을 스트리밍 하면 시청자 수 0명의 방에도 시청자가 생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청자는 "같이" 하지 않겠냐고 말한다. 방송을 보러 왔으면 방송만 보면 될 텐데, 항상 같이 하자고 말한다. 누군가와 같이 하고 싶으니까. 나는 같이 할 사람이 없는 사람이니까. 

게임할 때마다 서버 만들려니 불편해서 서버 파서 친구끼리 모아두면, 항상 그러는 친구가 있다. 어떤 게임을 하든 자꾸만 '같이' 하려는 친구. 다른 사람과 같이 게임하고 싶은데 할 사람이 없거나, 소외되는 거 같아서 자기도 끼고 싶어 하거나. 정작 게임만 하고 보이스 안 하면 재미가 없는지 보이스 안 하냐고 찡찡거리는. 

정말 같이 하고 싶을 때 같이 하자고 하면 이해하는데, 습관적으로 같이 하고 싶어 하는 듯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마이너 게임이라 친구와 게임할 일이 적은 시청자처럼, 친구와 보이스하며 게임하고 싶어 목말라 있는 외로운 친구처럼.

VRC 유저가 이러한 경향을 보인다. 

1시간 내내 20의 재미밖에 못 누리고 있는데, 같이 있기만 해도 100이나 재밌는 친구가 접속하면 인바이트를 보내는 행동을 참기 어렵다. 100의 재미를 누리고 있는데 100의 재미를 만들던 친구이 다른 월드로 떠나면 인바 리퀘 보내는 행동을 참기 어렵다. 같이 있으면 즐거운 친구가 프라이빗에서 나오지 않고 있으면 어떻게든 프라이빗에서 꺼내고 싶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눈치 주는 형태로 사회가 굴러간다. 

 

친구의 압박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은 과몰입과의 시간을 만들 수 없다. 

친구 그룹을 포기하면 간단하다. 내가 봐왔던 여러 유저가 과몰입 때문에 주황불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친구 그룹을 포기하지 못 하는 유저도 많다. 

"과몰입이 접속하지 않은 날엔 누구와 시간을 보내지? 또 퍼블릭 나그네 생활을 해야 하는 거야?"

연인과의 시간은 같은 시간 축을 기준으로 한다. 나와 연락하고 싶을 때 나는 항상 존재한다. 과몰입과의 시간은 서로 다른 시간 축을 기준으로 한다. 나와 연락하고 싶을 때 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고작 연인 하나 때문에 포기한다니? 

머물고 있는 '유일한 사회'가 엄청 중요해서, 친구 그룹에 종속되어 있어 연인에게 집중할 수 없다.

현생과 비교하니 더 억울하다. 현생에선 연인과 시간을 보내느라 친구 그룹과 자주 놀지 못 해도 단톡에 몇 마디 쓰고 가끔 술이나 한 잔 마셔주면 여전히 친구인데, 왜 VRC에서는 한 달 동안 주황불 켜고 찾아오지 않으면 친구라는 글자가 희미해질까. 

 

"친구 그룹에서 같이 놀면 되잖아?"

그렇다. 옳은 해답이고, 현명한 생각이다. 친구 그룹에서 과몰입과 즐겁게 보낼 수 있다. 

다만, 과몰입을 '비밀'로 유지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주변에서 놀릴 게 뻔하니까, 게이처럼 보이기 싫으니까, 과몰입 절대 안 한다고 했는데 하면 쪽팔리니까, 자기 얼굴을 알고 있는 친구가 그룹에 있으니까, 자기 현실 친구가 그룹에 있으니까 등 여러 이유로 과몰입 선언을 하기 싫을 수 있다. 

의심받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같이 떠났다가 의심받을까 데이트도 못 한다. 용기를 내 주황불로 떠나도 친구 그룹의 멤버가 문을 열어 달라고 자꾸만 문을 두드린다. 눈 딱 감고 데이트하고 돌아오면 왜 자꾸 다른 곳 놀러 다니냐며 눈치를 준다. 

결국, 친구 그룹의 압박을 피하려고 욕구를 포기한다. VRC에 같이 접속하고 있는 시간에도 친구 그룹에서 '친구인 척'하며 친구와 할 법한 대화만 하게 된다. 과몰입을 비밀로 유지하는 동안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과몰입하는 동안 친구처럼 지내면, 과연 애정은 처음 그 때처럼 타오르고 있을까? 불씨도 장작을 넣어주며 꺼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유지된다. 모래를 잔뜩 부어대고 불씨가 남아있길 바라면 안 된다. 

"이 정도면 과몰입이 아니라 '친구' 아냐?"

친구 그룹을 포기할 수 없다면 과몰입 선언을 해야만 한다. 친구 그룹에서라도 애정을 드러내며 어떻게든 불씨를 유지해야만 한다. 과몰입 선언을 하기 싫다면 친구 그룹을 포기해야만 한다. 

"친구도 소중하니까 친구랑 다 같이 놀자"는 문장과, "과몰입 비밀로 했으면 좋겠다"는 문장은 같이 사용할 수 없다. 같이 사용하는 순간 "네 마음의 불씨를 꺼뜨려라"는 의미가 탄생한다. 

눈치 보느라 골든타임 놓치고 환자 왜 죽었냐고 물어봐야 어떠한 의미도 없다. 상대가 내게 애정이 식은 듯 보여 혼자 마음 끙끙 앓으며 고민해 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 

디스코드로 애정표현 해왔으니 VRC에서 친구처럼 지내도 괜찮을까? 디스코드로 유지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들은 VRC를 접하기 이전부터 디스코드로 랜선 연애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디스코드로 과몰입했다는 유저는 내가 본 적이 없다. 

과몰입이 '과몰입'인 이유는 VRC에 과몰입했기 때문에 과몰입이 아닐까? 

 

친구 그룹에서 과몰입과 어울릴 생각이라면 과몰입 선언을 해야 한다. 
과몰입 선언이 싫다면, 친구 그룹에서 같이 어울릴 생각은 접어야 한다. 

무조건.

다른 선택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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