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에 과몰입을 처음 해본 뒤, 1년 반 가까이 시간이 지나는 동안 과몰입을 다시 하고 싶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친구들이 계절에 따라 과몰입을 시작하고, 과몰입은 게이 같다며 하지 않는 이들조차 과몰입을 시작하고, 짧은 기간 동안 몇 번이나 과몰입을 갈아치우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들을 부러워한 적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한 번 해봤으니까 느낌 알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와 맞는 행위는 아닌 거 같다.
누군가에게 속박되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느끼며 서로 맞춰가는 일이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피곤하기만 한 일. 여러 사람이랑 재밌게 놀 수 있는데, 굳이 재밌지도 않을 과몰입에게 최선을 다하는 일이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잘 할 자신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행위를 누군가가 나와 하고 싶다고 받아줘 봐야 상대방에게 민폐일 뿐. 한 번 해봤으니 느낌 알잖아 아마추어 아니잖아.
한 사람이랑 어떻게 재밌게 지낼 수 있을까.
과몰입하는 동안 도대체 어떻게 행복해진다는 건지.
얘가 줄 수 있는 재미는 한계가 있는 반면 얘가 내 어깨에 올리는 관계의 책임은 무한한데, 이게 수지타산이 맞는 행위인가? 내가 얻을 관계의 행복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데, 내가 다른 사람과 얻을 수 있는 관계의 행복을 모조리 차단당하는 게 맞는 행위인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다시 하고 싶지 않았고, 1년 넘게 관심도 두지 않았던 거였다.
다른 사람에겐 애초에 내 마음이 그리 강하게 불탔던 적이 없으며, 다른 사람이 내게 불태울 땐 어차피 나 같은 하자 있는 애를 좋아할 감정이면 금사빠 같은 마음일 텐데 신경 안 써도 되겠지. 어차피 일주일 동안 거절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 접을 갈대 같은 마음이라면 내가 사양.
하지만 요즈음,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평범한 친구 관계에서 얻어낼 수 있는 감정의 폭이 너무나 좁다고 느낀다.
조금 더 상대방이 내게 진심인 모습을 보고 싶다. 조금 더 다양한 감정을 먹고 싶다. 현실에서 먹기 어려운 감정을 먹기 위해 대리만족으로 VRC를 하는 거라면, 조금만 더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친구 관계로 얻는 감정은 감정의 폭이 너무나 좁다. 특히나 현실 친구조차 되지 못 하는 온라인 게임 친구 관계는.
내가 VRC를 하는 목적은 정해져 있다.
호감과 같은 긍정적 감정을 먹기 위함이다. 내 삶에선 생각보다 섭취하기 어려운 감정. 긍정적 감정을 얻기 위해 특별한 관계가 될 필요까진 없다. 친구로서도 충분히 얻어낼 수 있다. 우리가 긍정적인 관계라고 착각하거나, 너와 긍정적으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 욕망 둘 중 하나만 있으면 되니까.
친구 관계로도 서로 호감이 있다면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감정이지만.
아까 말했다시피 친구 관계에서 얻어낼 수 있는 감정의 폭이 너무나 좁다.
친구는 우선순위가 아니고, 서로 호감이 있어도 잠시인 경우가 많다. 현실에선 인간관계가 한정적이지만, 이 게임은 초록불로 서로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새로운 재밌는 친구에게로 마음이 금세 떠난다. 내게 매달려주지도 않고 나를 그렇게까지 예뻐해 주지도 않는다. 아무리 잘났어도 애완동물을 귀여워하는 정도의 관심과 호감. 야한 걸 하자는 듯한 도킹. 떠받들어주며 행해지는 애매한 성희롱 정도. 그리고 가끔 스트레스 받을 정도로 집착하는 이상한 녀석의 관심 정도. 그 정도가 친구로 얻을 수 있는 감정의 레벨.
나중에는 긍정적 감정을 먹기보다 부정적 감정을 먹는 일이 더 많아지기도 한다.
긍정적 감정을 얻기 위해, 친구의 공간에서 만족하지도 못 한 채 친구의 관심을 받고자 노력하는 일 따위의. 시간 버려가며 친구의 옆 자리를 지켜가며 잠시 내게 관심을 주는 그러한 상황이 전부인 채, 나를 그다지 신경 써주지도 않는 모습을 보며 시간을 버려가는 채 부정적 감정을 쌓아가기도 한다.
그러한 감정을 쌓다 보면 느낄 수 있다.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지?
고작 이거밖에 안 되는 감정을 얻자고 아등바등 발버둥 치고 있는 거였나?
그런데 고개를 돌려보면, 서로 붙어 서로가 가장 최우선인 듯 행동하는 친구들을 보면 무언가 조금 다르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하고 만다. 과몰입이 그렇게까지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무수히 쏟아져나오는 도파민을 원한다면 일주일마다 파트너 바뀌는 쓰레기 같은 관계가 될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막연하게 생각하고 만다.
내가 만약 일주일마다 과몰입을 갈아치우는 쓰레기 같은 유저가 된다면, 지금보다 차라리 더 재밌지 않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착각 속에 살고 싶어.
예전이었으면 민폐라 생각하고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VRC를 하면서 할수록 점점 커지는 생각 "많은 이가 다른 이를 NPC처럼 생각한다"은 내 생각마저 바꿔 간다. 어차피 다른 이는 나를 NPC처럼 생각하며 쾌락의 도구로 이용하는데, 내가 타인을 이용하는 게 잘못된 건가? 진지한 관계여야 한다고 믿어왔던 관계조차 가볍게 생각하고 이용해도 괜찮은 거 아닐까? 현실에서 연애를 사랑이 아니라 '놀이' 정도로 취급하며 다루는 사람들처럼.
일주일마다 바꿔가며 서로에게 진심인 양 행동하는 역겨운 무언가를 내가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걸 하면 친구로는 얻지 못 했던 그 이상의 긍정적 감정을 섭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최근 들어 가끔씩 하고 있다.
과몰입 역겹다며 안 하겠다던 사람들이 지금 다 과몰입 하고 있는 마음도 이런 마음과 별 다를 바 없지 않았을까. 주변에서 과몰입이 늘어나며 서로 꽁냥거리는 듯한 모습을 보던 중 누군가가 자기에게 들이댄다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 과몰입을 하고 싶다고 염불 외듯이 돌아다니고 왜 나만 과몰입 없냐 왜 나만 좋아해 주는 사람 없냐며 우울해하던 친구들도 주변에서 과몰입 하는 행위를 보며 막연하게 부러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듯이.
친구들이 과몰입하는 모습에서 발견했겠지 자신이 먹고 싶어 하는 감정이 거기에 있단 사실을.
'VRChat > VRC 보고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지와 양지의 경계 [VRChat 보고서 72편] (0) | 2024.08.04 |
---|---|
인기와 유명세, 그리고 친구 [VRChat 보고서 71편] (0) | 2024.08.03 |
감정이 죽지 않았어도 이젠 찾지 않는 이유 [VRChat 보고서 69편] (0) | 2024.07.23 |
암캐를 남자라고 할 수 있는가? [VRChat 보고서 68편] (0) | 2024.06.20 |
모든 음식은 결국 다 상한다 [VRChat 보고서 67편] (1) | 2024.06.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