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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같은 시간 축에 사는 사람과 [VRChat 보고서 47편]

by 심해잠수부 2024. 2. 6.

백수는 백수끼리, 학생은 학생끼리, 직딩은 직딩끼리 어울리는 게 좋다.

백수는 직장인이랑 친하게 지내면 안 된다는 뜻인가요? 십대는 서른 아저씨랑 친하게 지내면 안 된다는 뜻인가요?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백수와 직장인이 어울리지 못 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십대와 삼십대가 나이 차 때문에 쉽게 어울리지 못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런데 유사한 사람끼리 어울려 놀라고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은 이미 유사한 사람과 어울려 놀고 있다.

나와 친하게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은 나와 같은 시간 축에 살고 있는 유저니까.

 

서로 접속하는 시간대와 플레이 타임이 유사해야, "같은 시간 축에서 살고 있어야" 친하게 오래 지낼 수 있다.

직장인이 오후 9시에 접속해서 새벽 1시까지 총 4시간 플레이한다. 금요일 주말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쭈욱 달리고. 그런데 백수는 하루 12시간씩도 하며 주말을 특별한 시간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이러한 두 사람이 만나 서로 성격이 잘 맞는다고 해도, 서로 다른 시간을 향유하는 문제는 관계에 나쁜 영향을 지속해서 끼친다.

 

게임에 투자하는 시간에 따라 게이머로서의 삶(시간)은 상대적으로 흐른다.

하루 4시간 플레이하는 유저는 4시간 동안 만난 어울려 노는 시간으로 흘러간다.
반면 하루 12시간 플레이하는 유저는 12시간 동안 만나 어울려 노는 시간으로 흘러간다.

하루 4시간 플레이하는 유저는 4시간에서 시간이 멈추어있다. 하루 12시간 플레이하는 유저는 12시간에서 시간이 멈추어있다. 그러니까, 4시간 하는 유저는 4시간만큼의 변화에서 멈춰있는데, 12시간 플레이하는 유저는 4시간 플레이하는 유저보다 8시간만큼 더 많이 변화한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설명해보겠다.

 

A는 금요일에 한 번 총 4시간을 플레이하고,
B는 일주일에 일월화수목금토 하루 10시간씩 총 70시간을 플레이한다.

A와 B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만나 서로 친해졌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A는 일주일 전 B와 두근두근했던 시간 그대로 멈춰있다. 일주일이 지난 후 금요일에 접속했을 때 기억 그대로 B에게 호감도 만땅인 상태로 접근한다.

하지만 B는 심드렁하다. B는 하루 10시간씩 총 70시간을 플레이하며 여러 사람을 잔뜩 만나고 잔뜩 친밀도를 쌓았으니까. B의 시간이 60시간 넘게 흐르는 동안 B의 기억 속에서 A는 차츰 밀려났다. B의 마음은 60시간 중 40시간을 같이 보낸 사람에게 가 있다.

인터스텔라를 생각하면 좋다.

어떤 행성에 잠시 내려 다녀왔을 뿐인데, 동면 장치에서 수면하지 않은 같은 팀 동료는 아저씨가 되어있다.

 

A와 B가 같은 시간 축에 사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둘 다 일주일에 4시간씩 한다. 둘 다 호감도 만땅 쌓은 채로 다른 시간을 보내지 않고 똑같은 시간에 또 만났으니 여전히 호감도 만땅인 상태로 알콩달콩 시간을 보낸다. 만약에 한 사람이 바빠서 3주를 못 들어왔다고 해도, 그 사람은 일주일에 4시간밖에 하지 않으므로 3주 동안 들어오지 못 해도 총 12시간밖에 흐르지 않는다.

12시간 차이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만약에 일주일 4시간 하는 유저와 일주일 70시간 하는 유저가 3주 동안 보지 못 한다면 어떻게 될까?

210시간만큼의 격차가 생긴다. 210시간 동안 게임에서 지냈으면 그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나고 많은 관계가 바뀌었을 테니 3주 전에 봤던 사람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옳다.

사람이라는 게 그리 크게 변하지 않고, 친하든 친하지 않든 친구라면 소중히 잘 대해주려는 사람도 분명히 있으니 그렇게 멀어지고 그러진 않겠지만, 210시간 전에 나에게 100만큼의 관심을 줬던 사람이 210시간이 지난 후에도 100만큼의 관심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 사이에 더욱 중요한 사람이, 더 많은 사람이 주변에 생겼을 테니까.

 

시간 축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야 할 때 중요한 요소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가 과몰입 하자고 고백했는데 이걸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한다면, 가장 최우선으로 그와 내가 같은 시간 축에 살고 있는지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20살 초반 친구가 30대 아저씨에게 고백했을 때 '세대 차이' '인생 경험' 따위의 문제를 생각할 게 아니라, 같은 시간 축에 있는지부터 봐야 한다.

매일 저녁 9시나 되어서야 들어오고 하루 3시간밖에 못 하는데, 상대는 오전 수업 끝나고 12시간씩 브얄하고 어떤 때에는 시험공부한다고 아예 한 달을 안 들어올 텐데, 이렇게 서로 시간 축이 어긋나도 잘 지낼 수 있을까?

디코 등의 도구를 사용한다면 서로 디코로 관심을 주면서 시간 축을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지만, 디코엔 왜 과몰입이라는 말이 없는지 한 번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몰입은 VRC에만 있는 특수한 무언가고, VRC에서의 친밀도는 VRC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 때 그 감정을 유지하려면 VRC에서 만나야만 한다.

VRC의 시간 축을 함께 향유할 수 없는 사람과 진지한 관계를 맺는다면, 피곤한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과몰입 같은 무언가가 아니더라도, 내가 이 사람에게 마음을 많이 줘도 괜찮을지(나중에 상처받지 않을지) 고민이 된다면 서로 같은 시간 축에 있는지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서로 환경이 다른 사람은 좋아하지도 말고 친해지지도 말라는 건가요?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당연히 서로 좋아하고 잘 지내려고 한다면 시간 축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하루 10시간씩 하는 사람이라도 하루 10시간 풀로 땡기는 거도 아니고 낮엔 어차피 사람 없어서 심심해서 잘 안 들어와서 직장인이랑 시간 축 비슷하게 흘러갈 텐데.

다만, 시간 축이 달라서 생기는 상대의 (알 수 없는) 변화가 섭섭하게 느껴질 때가 생각보다 많다는 얘기일 뿐이다.

상대는 그저 100시간만큼 지나서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호감을 느끼고 그와 더 잘 지내려고 하고 친하게 지내려 하고 골고루 만나려고 하는데, 자기 혼자 일주일 전 4시간의 기억으로 (일주일이 지난 후) 왜 갑자기 차갑게 대하는 걸까 고민해 봐야 아무런 답도 나오지 않는다.

그 사람은 100시간만큼 새로운 경험을 해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자기 혼자 100시간 전 과거 기준으로 생각하며 섭섭하게 여겨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친구가 '갑자기' 변했다 생각하겠지만, 친구는 내가 없는 일주일 동안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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