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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10배 압축 감정 소모 [VRChat 보고서 28편]

by 심해잠수부 2023. 7. 11.

VRC에서의 1시간은 현실 시간으로 10시간 분량이다.

공감하는 독자가 얼마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내가 1년 동안 VRC에서 굴러본 경험으로는 확실히 그렇다. VRC와 가장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따져보라면 나는 군대라고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는데, 이는 군대의 시간도 바깥의 시간에 비해 엄청나게 느리기 때문이다.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메인 콘텐츠가 똑같기 때문이다. 

VRC의 콘텐츠와 군대의 콘텐츠가 동일하다.

군대의 시간이 느린 주된 원인은, 시간은 많은데 즐길 거리는 없기 때문이다.

항상 규칙적으로 일찍 일어나고 해 떨어지면 일찍 잠드는 주제에, 훈련 없으면 일과조차 시간 남아돌 정도로 여유롭게 진행된다(요즈음이야 핸드폰 때문에 조금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예전엔 그랬다).

전자레인지 앞에서 시간이 느려지는, 가스레인지 앞에서 시간이 느려지는 원리와 같다. 전자레인지 앞에서 할 일도 없이 서 있으면 1시간처럼 느껴지지만, 전자레인지 돌려두고 컴퓨터에서 만화라도 보고 있으면 20분 훌쩍 지나서 "아, 맞다." 해버린다. 

심심한 상태가 지속되는 공간일수록 시간은 느려진다.

VRC도 똑같다.

게임에 접속한 순간, 내가 게임을 종료할 때까지 내가 무얼 즐길지 찾아다녀야만 한다. 롤, 에펙 등의 게임은 게임 한 판 끝나면 또 다음 큐를 돌리고 계속해서 진행할 수 있지만, VRC에선 어떠한 그룹 안에서 대화를 한다고해도 '나' 중심으로 대화가 진행되지 않으면 붕 뜨게 된다. 붕 뜨는 시간 동안 전자레인지의 남은 시간을 쳐다보듯 소셜 창을 자꾸만 들여다보며 지루하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으면 시간의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군대에서는 전역 때문에 '시간'을 의식하니까 '느리게 가고 있다'고 인지라도 할 수 있지만, VRC에선 전역 예정일 따위 없기 때문에 100시간 같은 10시간이 지나도 다들 아무 위화감도 느끼지 못 한다.

 

그래서, VRC에서 일어나는 일은 현실에서 겪을 감정 소모의 압축판이다.

군대처럼 100명의 사람과 24시간 어울리기 시작하는 군대가 아니고서야, 학교 졸업 후 '10명 이상'의 사람과 어울릴 일이 드물다. 중고등학교 때도 3~4명의 친구와 어울리던 친구랑만 어울리던 사람이, 대학교를 거치고 취직을 했다고 한들 사람과 부딪쳐 봐야 얼마나 부딪쳐 봤을까.

그런데 VRC에선 정말로 만큼 많은 사람과 부딪친다.

평생 느껴볼 일 없는 포지션으로, 평생 내 성격의 문제가 뭔지도 모르고 살다가, 놀기 위해 특정 그룹과 자발적이면서도 반강제적이기도 한 느낌으로 어울리려고 노력하다 보면, 트러블의 충격은 항상 크게 다가온다. 인간이 무리 지어 있으면 어디서든 항상 트러블이 발생하지만, 잘 보이려고 노력한 상대와의 트러블은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10배속이라, 너무 많은 일을 너무 짧은 시간에 겪는다.

"나"가 살아가는 시간은 1배속인데, VRC에서 겪는 시간은 10배속이다. VRC에서 10배속으로 무언가를 경험하지만, 고민은 '현실의 나'가 1배속의 삶에서 고민하고 생각해야만 한다. 10배라는 시간 차이 때문에 10배 압축된 강한 감정 소모를 겪을 수밖에 없다.

멀쩡한 사람도 VRC 하면 우울싸개 된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다.

처음엔 멀쩡한 사람도 1년 정도 구르고 나면 게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울기도 하고 우울해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화도 내고 난리가 아니다. 깊은 관계가 아닌 사람이 보기에만 멀쩡해 보일 뿐이지, 깊이 잘 보면 속은 곪을 대로 곪아있다. 서로 이런저런 트러블을 거치면서 울기도 하는 등 별의 별 일이 다 있어 왔으니까.

나도 잔뜩 겪어봤고 나도 감정 소모 엄청 심하게 겪어봤다.

처음엔 게임에서 항상 가볍고 즐겁게 놀던 사람이 어느 순간 보니 누군가를 향해 집착하고 있고, 자기 뜻대로 안 되고 좋아하는 사람이 자길 멀리하는 거 같으니 우울 싸는 일 정말 자주 볼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같이 그룹에서 어울려 놀던 사람도 처음엔 즐거웠어도 나중엔 단점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니까 점점 틀어지고 멀어지고 그러다 싸우고 실망하고 우울해하고.

그래 놓고 알콜 중독자처럼 술 마시며 풀고 하하호호 대다가 똑같은 일 반복하고 또 술로 풀고, 이게 뭔가 싶은 행동의 반복. 무언가 싸우고 화해하고 나아가는 게 아니라, 싸우고 손절하고 덮어두고 넘어가거나 싸우고 술로 풀고 해결되지 않고 또 싸우고 술로 풀고. 새로운 사람 만나서 잠시 잘 지내다가 또 똑같은 일 반복하고.

그러면서도 게임을 접지 못 하고 습관처럼 지속하는 상황.

10배 압축 마굴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이 게임하는 목적이 명확해야만 한다. 현실보다 우선시되어서 안 되고, VRC 인간관계에 너무나 크게 쏠려버리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현실에서보다 훨씬 따듯하게 대해주는 이에게 그러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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