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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을 얼마나 아시나요? [VRChat 보고서 53편]

by 심해잠수부 2024. 3. 16.

"전 그를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여러분은,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을 얼마나 아시나요?"

 

우리는 어떠한 가치관 때문에 어떠한 플레이를 거부한다.

게이 같으니까 과몰입을 하지 않고, 역겹다며 브야스를 일절 시도하지 않는다. 컨디션을 이유로 브수면을 거부하고, 어지럽다고 게임 월드를 피하고, 병신 같다고 거울 앞에서 떠드는 방을 피하고, 시끄럽다고 사람 많은 방을 피하고, 지루하다고 둘이 있는 방을 피하고, 퍼블릭을 싫어하고 또는 프라이빗을 싫어하고, 멍청한 애들이나 한다며 트위터를 피하고, 부담스럽다며 갤 등의 커뮤니티를 피하고, 번개를 피하고, 디스코드를 피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유저는 하는 어떠한 플레이를 거부한다.

나도 하지 않는 요소가 많다.

과몰입도 한 번 해본 뒤 절대 하지 않으며, 눈깔 아프다고 브수면을 피한다. 게임 월드를 피곤해하며 퍼블릭도 잘 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트집잡히는 일이 싫어 커뮤니티도 하지 않는다.

친구가 하는 건 상관없지만 내게 들이밀면 나는 거부하기 바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알량한 가치관으로 이러한 플레이를 거부하는 일이 내게 손해라는 일을.

"우리가 게임을 시작한 이상 게임을 그릇 밑바닥까지 싹싹 핥아먹으며 물고 뜯고 씹고 맛보는 게 가장 좋다. 우리가 어떠한 제품을 샀을 때 최대한 뽕을 뽑으려고 노력하듯이, 우리가 게임 하나 사면 어떻게든 재밌게 즐기려고 노력하듯이 VRC도 밑바닥까지 긁어먹을 필요가 있다." 라는 식상한 얘길 하고픈 건 아니고.

 

VRC를 즐기는 유저는 관계를 맺는 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관계를 맺는 일은 건 타인을 알아간다는 일과 같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고 친해지기 위해 VRC를 한다.

물론, 게임 월드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나처럼 게임을 주제로 글을 쓰거나 만화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아바타를 만들거나 SNS에서 관심을 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게임에 정착한 웬만한 유저는 다른 사람과 재밌게 떠들며 놀고 싶어 게임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야한 거든 과몰입이든 단순히 노가리 까는 거든 뭐든 간에.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나?

나는 친구의 직장 생활이 가끔 궁금하다.

얘 우리 사이에선 되게 자기 잘났다는 듯 말하지만 회사에서도 그렇게 잘났을까? 얘 우리에게 얘기하는 내용 보면 회사에서 은근히 입지가 안 좋은 거 같던데. 아빠가 자식들에게는 강한 아빠지만 회사에서도 그렇게 강할까. 엄마가 자식들에게는 따듯한 듯 보여도 엄마도 친구들 사이에서 누군가와 정치질을 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는 그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가 본 그의 모습은 나와 접한 환경의 어떠한 단면일 뿐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친해지며 관계를 쌓아가기 위해 게임을 하지만, 정작 그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개인신상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 아니, 그 사람 내면의 진리, '그'의 가치관도 사고방식도 행동 양식도 하나도 모른다. 그저 나를 대할 때 나오는 모습만, 내가 활동하는 반경에서 보여지는 모습만을 알아간다.

가족이 보는 모습과 동료가 보는 모습이 다르듯, 친구가 보는 모습과 가족이 보는 모습이 다르듯, 친구가 보는 모습과 동료가 보는 모습이 다르듯, 우리는 어떠한 사람을 알기 위해서 정말 많은 경험을 해야만 한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연봉, 타는 차, 나온 학교, 나이, 키, 몸무게 따위가 아니라, 그는 정말로 어떤 사람일까.

가족과 지내는 모습도 봐야 하고, 친구와 지내는 모습도 봐야 하고, 동료와 지내는 모습도 봐야 하고, 학교에서 군대에서 지내는 모습도 봐야 하고, 게임도 같이 해봐야 하고, 섹스도 해봐야 한다.

접점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봐야만 그를 조금 더 알 수 있다.

 

사실, 그딴 거 몰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궁금하지 않나?

 

우리 그룹에선 인기는 개뿔 개병신 취급받던 이 새끼가 저기 그룹에선 그렇게 인기가 많다고? 왜? 맨날 1인 파란불 프빗방에서 우울 싸는 줄 알았던 애가 커뮤니티에선 호감고닉이라고? 왜? 개씹상남자인 줄 알았던 애가 침대 위에서는 그렇게 귀여운 소릴 낸다고? 어떻게? 같이 대화할 땐 짜증만 나던 애가 같이 롤 할 땐 그렇게 멋있게 캐리를 해준다고? 진짜? 맨날 PC로 들어와서 노잼인 줄 알았던 걔가 음악 취향이 나 뿅 가게 할 정도로 그리 개쩐다고? 설마. 어버버버 하던 애가 노래방 월드에선 그리 멋있다고? 말도 안 돼. 퍼즐 월드를 그리 잘 한다고? 평소엔 동영상 앞에만 멍하니 서있는 애가 브수면 할 땐 그리 귀엽게 포즈 취해서 자고, 묵언이라 답답하던 걔가 춤을 그리 잘 추고. 다시 봤어.

묵언만 하던 애가 갑자기 마이크 켜면 목소리와 말투가 생각보다 귀여워 주변 친구들이 다시 보는 경우처럼, 좋은 케이스가 정말 많을 텐데. 그런 기회가 정말 많을 텐데도 우리는 자신의 어떠한 가치관 때문에 어떠한 플레이를 거부한다.

나도 무서운 게 싫어 공포 월드를 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공포 월드에서 볼 수 있는 친구들의 어떠한 면을 보지 못 한다. 나는 영원히 공포 월드의 그들 모습을 보지 못 한다.

과몰입을 안 하는 유저는, 브야스를 안 하는 유저는, 게임 월드를 안 하는 유저는, 저댄을 안 하는 유저는, 퍼블릭을 가지 않는 유저는 등등 누군가의 어떠한 모습을 볼 기회를 거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건 관계를 맺는 게임에서, 그를 알 수 없게 만드는 일과 같다.

거부하는 요소가 많을수록 그의 숨겨진 면은 많을 수밖에 없고, 재미는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이 '단편적이라서' VRC에 실망했다면, 오히려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볼 필요성이 있다. 내가 단편적인 모습만 보려고 했던 건 아닌지. 매일 같은 방에 박혀 같은 플레이를 하고 같은 플레이를 거부하며 항상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대화만 하고 있진 않았는지.

매일 똑같은 사람을 봐도 그에게 열어볼 수 있는 요소는 너무나도 많다.

그가 재미없어 보이는 건 사실 내가 어떠한 면을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못 생겼으니 대화도 해보지 말아야지."잘 생긴 게 좋긴 해. 그치만 못 생겼다고 대화조차 해보지 않으면 그를 알 수 없다. 사실은 나와 정말 잘 맞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친해져도 섹스도 안 하고 연애도 안 하겠지만, 그래도 정말 말 잘 통하는 절친이 될 가능성까지 함께 배제했을 수 있다.

사람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상황을 거부하는 일이어도 그리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음지를 굳이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요?

당신, 옆에 있는 그 누군가의 숨겨진 매력적인 면을 다 놓치고 있는 걸 수 있어!

 

마지막에 농담처럼 하긴 했는데, 어떠한 플레이를 하지 않을수록 자기만 손해일 수 있다는 얘기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재미로 하는 게임에서, 누군가의 매력을 그릇 밑바닥까지 싹싹 핥아먹지 못 하고 일회용품 쓰다 버리듯 너무 쉽게 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내가 어떠한 상황을 받아들인다면 주변 사람이 더 재밌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데.

내가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별 거 아닌 나만의 편견으로 만들어진 나의 자그마한 가치관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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