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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주황불, 겉도는 자, 그리고 인스턴스 탈주 [VRChat 보고서 51편]

by 심해잠수부 2024. 3. 9.

쌓아온 플레이 시간만큼 친구가 많이 늘어났다. 자주 보는 친구도 있고 거의 보지 않는 친구도 있고, 사실상 친구 목록에 이름만 올라간 친구도 있다.

나는 상시 주황불을 하고, 친구들이 있는 인스턴스를 많이 찾아간다. 주황불인 친구에겐 리퀘나 인바도 자주 보내고. 거절해도 상심하지 않고 다음에 또 보내고 그런다. 나에겐 왜 안 오냐 섭섭한 친구도 있겠지만, 나는 언제 보냐며 불만을 드러내는 친구도 분명 있지만 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내가 주황불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향이 다른 유저끼리 물어뜯는 일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내게 음지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더라도 나는 주황불을 했을 거다.

조인한 친구가 새로운 대화를 열고 오래 대화하다 보면 먼저 있던 친구는 탈주 각을 잰다. 반대로, 인사만 받아주고 기존 대화를 더 중요시하면 신경도 안 써준다며 섭섭해하며 나중에 조인한 친구가 탈주 각을 잰다.

내게 조인했을 때 무리에 잘 섞여 놀면 내가 주황불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적당히 치고 들어오고 무리도 친구를 잘 받아주어 대화를 잘 하면 괜찮다. 하지만 모든 공간이 그러지는 않는다. 개인의 성격이 무리와 맞지 않는 경우도 있고, 무리 구성원 중 누군가가 벽을 치는 경우도 있고, 누군가가 낯을 많이 가리는 경우도 있다.

관계 문제가 아니라 아예 방해되는 행동을 할 때도 있고. 인사하러 조인한 줄 알았더니 대화에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옆에서 가만히 세워두며 얘기를 엿듣기만 하는 유저나, 조인한 친구에게 대화할 길을 열어줄 마음이 전혀 없는 유저나, 반대로 기존 대화하던 유저를 무시하고 오자마자 자기랑 나만 얘기만 늘어놓는 조인한 유저 등.

내 앞에 있는 친구와의 대화에 최선을 다 하고 싶어서, 제삼자의 개입으로 터트리고 싶지 않아 주황불을 한다. 나에게 찾아올 친구에게도 최선을 다 하고 싶기 때문에 지금 놀고 있는 친구와의 시간을 마무리한 뒤 만나고 싶어 주황불을 한다.

초록불로만 지낸다며 자긴 당당하다는 친구들, 자기 친구가 조인했을 때 친절하게 이끌어주는 일 그리 많지 않다. 좋아하는 친구에겐 기존 대화까지 포기하며 잘 해주려고 하지만, 애매한 친구가 오면 기존 대화를 끊기 아까워 인사만 해주고 기존 대화로 돌아간다. 자기에게 조인한 이를 방치한다.

조인한 이가 낯선 무리에 껴서 대화를 '같이' 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낯선 이가 대화에 자연스레 끼는 일은 개인 능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성향 안 맞는 거 빤히 보이는 무리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고, 성향이 맞더라도 대화 구성원이 상냥한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무언가 말을 했을 때 잘 들어주려고 하는 유저도 분명 있지만, 오히려 경계하며 저 병신은 뭐지 싶어 답도 잘 안 해주는 경우도 꽤 많다.

나도 그럴 때가 있다.

잘 치고 들어오는 웃긴 센스쟁인 얼마든지 환영이지만,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는 '스킬 떨어지는 이'가 갑자기 딱딱하게 끼어들면 잘 받아주려고 해도 잘 받아줄 수가 없다. 퍼블릭에서 자기들끼리만 대화한다며 욕하는 만화가 자주 등장하는데, 걔네가 그러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모두가 어린아이에게 잘 해주는 착한 어른은 아니다. 상냥한 선생 어른은 드물다.

잼민스러운 아바타가 와서 갑자기 와서 안녕하세요 인사해 봐야 할 수 있는 말도 없고, 자기들 대화 방해 받았을 뿐이니까 귀찮기만 하다. 그렇다고 대화를 듣다 낄 만한 타이밍에 친한 듯 대화에 끼려고 한다? 친밀감 형성이 되지 않은 상황에, 마음을 열어두지도 않은 유저들에게 노력한 말을 던져봐야 그들은 불편하기만 하다.

예쁘거나 재밌거나 하는 어떠한 강점이 있어 쉽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이가 아닌 이상 그들과 어울리기 쉽지 않다.

그들과 어울리려면 주기적으로 만나며 구성원과 조금씩 친해져야만 한다. 대화는 하지 않아도 서로 오가며 얼굴을 마주치고 가끔씩의 짧은 대화로 서로를 파악하면서 구성원과 안면을 트기 시작했을 때부터 '같이' 대화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은 인내를 요구한다.

퍼블릭에서 처음 만남에 재밌는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데, 퍼블릭에서 누군가와 가장 빨리 친해지는 방법은 퍼블릭에서 여러 번 마주치는 일이다. 마주치기 쉽지 않겠지만, 사람 적은 낮 시간에 맨날 똑같은 시간에 거울 앞에서 자고 있으면 그걸 보는 누군가는 그녀에게 내적 친밀감을 가질 수도 있다.

많은 영업 초보가 처음 만남에 거래를 성사시키려고 하지만, 절대로 영업은 하루 만에 성사되지 않는다. 최소한 5번. 처음엔 인사만 하고 끝난다. 여러 번 만나 영업맨이 어떠하다 판단됐을 때 그제야 자사 제품 영업을 '개시'할 수 있다.

친구 관계도 똑같다.

대화하지 못 하고 방에 가만히 방치당하고 있어도 계속 기다리면서, 짧게라도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기면 대화도 해보며, 그리고 친구도 나를 방치하지 않고 적당히 케어해주면서 다른 친구가 나에게 관심 가질 만한 떡밥을 조금씩 던져주어야만 한다. 그제야 '낯선' 느낌이 사라지고 무리에 동화되어 편안하게 '같이' 대화할 수 있다.

잠시 머무른다고 자기 스킬 조금 좋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여자면 남자들이 잘 대해주겠지. 아바타가 너무 예쁘면 얼빠들이 잘 대해주겠지. 목소리가 중성미나게 귀여우면 잘 대해주겠지. 하지만 여자도 아니고 아바타도 평범하고 목소리도 귀엽지 않은 나는 그렇게 상냥하게 대해주지 않는다. 내 글을 보는 사람들은 (정말 가끔) '아니 이 사람이 그 사람이에요?' 하면서 잘 대해줄 때가 있긴 한데, 그 외의 사람이 처음 만남에 나를 상냥하게 대해주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트위터나 갤 등 유저 많은 커뮤니티를 잘 사용하면 좋기도 하다. 처음 만남이 처음 만남이 아닐 수 있으니까. 번개에서 한 5번은 마주친 유저를 친구 방에서 만난다던가, 친구의 친구라 트위터에 자주 보이는 아바타를 퍼블릭에서 만난다던가 같은 느낌으로 완화시킬 수 있으니까.

티비 방송에 자주 나오는 연예인은 처음 본 사람이 정말 친근하게 대해준다. 나는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VRC에서 '겉돈다'는 표현은 인스턴스에서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내게 호의를 가진 유저가 있어도 내가 그에게 흥미가 없을 수도 있고, 내가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지만 그 누군가는 나를 엄청 상냥하게는 대해주지 않는 듯한 느낌을 말한다.

친구가 많냐 적냐는 중요하지 않다.

인스턴스에 친구가 많아도 그 친구들과 애매하게 친하다면 그들은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 기존 대화를 더 중요시할 테고, 내가 호의를 보여도 대화가 편안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대화가 딱딱하니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하다.

나와 지속해서 대화하려고 하는, 내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친구가 1명이라도 있다면 굳이 내가 인스턴스에서 나갈 일이 없다. 그런 친구가 없는 사람만 불편한 기류 속에서 자기가 낄 만한 공간을 찾다 군중 속의 외로움을 느끼듯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생각하며 도망가니까.

'겉돈다'는 의미는 인스턴스에서 즐거운 대화를 하지 못 하고 있다는 의미다.

 

나는 생각보다 인스턴스 탈주를 많이 한다.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며 대화의 주도권이 바뀌거나, 대화할 소스가 다 떨어져서 더 짜낼 수 없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내가 과몰입 둘이 있는 인스턴스에 들어가면 바로 탈주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과몰입 둘이 있는 공간에 내가 끼기 쉽지 않으니까. 부담스러우니까.

조인하고 몇 분 후 탈주하게 되는 인스턴스에 자주 머무는 친구에겐 어느 순간부터 조인을 잘 하지 않는다. 항상 과몰입이랑 둘만 있는 친구, 내가 찾아가도 자기 할 일 바쁘기만 한 사람, 맨날 술 먹으며 시끄럽게 대화하기 바쁜 사람 등. 내가 그들에게 조인해봐야 내가 대화할 만한 공간이 아니라는 게 뻔히 보이니까.

갈 때마다 그러한 인스턴스에만 있다면 어느 순간부터 굳이 기대를 하지 않고 찾아가지도 않는다.

아무리 친하고 아무리 호감이 있어도, 매일 브수면만 하는 사람 찾아가 봐야 의미가 없듯이 매일 술만 마시며 자기들끼리 떠들고 놀고 있거나, 나와 척진 사람이 있어 불편하기만 한 인스턴스에만 있는 친구를 찾아가 봐야 원활한 대화를 할 수 없는 그 공간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그를 보고 싶어 잠시 조인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인사도 가끔이지 무슨 맨날 인사하겠다며 찾아와봐야 친구들은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인사 와줘서 고맙다? 그런 생각 안 한다. 들어와서 나랑 놀지도 않으면서 인사한답시고 매일 찾아와봐야 귀찮게만 여긴다.

그와 놀려면 둘이서 보거나 다른 방에서 봐야만 하는데, 그는 그 공간이 좋아서 거기에 계속 있는 유저다. 내가 따로 불러봐야 그는 좋아하는 공간에 있기를 방해당했을 뿐이다. 내가 인바를 줬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얘 갑자기 왜 부르지 잠시 보고 빨리 와야겠다 정도로 끝난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라서

내가 잘 받아줄 수 없는 상황에 그들 마음대로 조인했다가 외로움을 느끼지 않길 바란다.

"조인한 그들이 감당하는 거지. 나도 항상 감당하는데?" 쉽게 말하고 싶지만, 나는 기존 대화를 망치고 싶지도 않고 찾아온 친구를 방치하듯 행동하고 싶지도 않다. 둘 다 원치 않는다.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행동하느니 차라리 마음대로 들어오는 일을 막겠다. 그래서 서로 마주치는 일이 줄어들어 조금씩 멀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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