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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전성기와 쇠퇴기 [VRChat 보고서 39편]

by 심해잠수부 2023. 11. 7.

2023년 7월부터 4개월 가까이 VRC 정말로 재밌게 했다.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이 있고, 안 좋은 일이 있어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더니 게임이 너무 재밌어졌다. 뉴비 때보다 훨씬 재밌게 했다. 당시 다른 친구가 전성기라는 표현을 쓰는 걸 들었는데, 전성기라는 표현만큼 지금 상황을 잘 표현할 수 없다 싶어, 나도 지금이 내 브얄 전성기라고 엄청 자주 말하고 다녔다.

그리고, 이젠 쇠퇴기인 거 같다.

 

전성기를 보내는 동안 나는 내가 인기가 많다고 느꼈다. 친구도 잔뜩 사귀었고, 다른 사람의 관심도 많이 받았고, 호감도 많이 받았으니까. 내 성격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서 (전부 내 변화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발생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뿌듯해하며 지금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생각해 전성기라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쇠퇴기에 들어선 지금 생각하면 의미 있는 이벤트는 아니었던 거 같다.

 

전성기로 가는 방법은 간단하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친구를 사귀면 된다.

관계의 초기엔 긍정적인 감정을 많이 얻는다. 타인에게 관심을 잘 보이지 않는 유저도 관계의 초기엔 상대방에게 신경을 많이 쓴다. 친해진 지 얼마 안 되어 단점도 모르고, 장점만 보며 친추 했으니 기본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친구를 사귀면 짧은 시간 동안 긍정적인 감정을 꽤나 많이 받을 수 있다.

문명 6의 흥망성쇠 시스템과 같다.

문명 6엔 황금기와 암흑기가 있다. 황금기를 이룰 경우 보너스를 많이 받기 때문에 정찰병을 열심히 돌리며 황금기를 이뤄내기 위해 노력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시대 점수를 받으면 일정한 수치를 넘고 '황금기'가 시작되듯이,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친구를 사귀면 긍정적인 감정 위주로 많이 얻어갈 수 있다.

하지만 황금기가 있다면 암흑기도 있다.

황금기에 들어서면 집중전략 점수를 받지 못 하는 패널티 때문에 황금기를 유지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친구를 많이 사귈 땐 좋았어도 친구를 많이 사귀어도 많은 친구에게 친구가 원하는 만큼의 관심과 애정을 주긴 어렵다. 내가 충분한 애정을 주지 못 하면 친구는 내게 관심을 거둔다.

모든 식물에 물을 골고루 주고 싶어도 내가 가진 물은 얼마 없다.

이러한 문제를 깨닫는 순간, 친구를 너무 많이 늘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게 잘 해주던 친구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써주려고 하지만, 내가 이러한 결심을 하는 순간 내가 신경 쓰겠다고 생각한 친구 외의 친구를 더욱 소홀히 대한다.

 

내 물을 받아먹는 소수의 식물 외의 다른 식물은 점점 더 시들어 간다.

 

전성기를 충분히 즐긴 만큼 쇠퇴기는 영 기분이 좋지 않다.

나를 향한 친구의 애정은 시들 만큼 시들었다.

친구 창에 있지만 선뜻 가기도 뭐하고, 적당히 잘 지낸다고 해도 깊은 관계는 아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선택할 일이 있다면 항상 다른 사람을 선택할 정도의 애정. 그 외 깊은 이벤트 따위도 일어나지 않고, 나는 선택해 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과는 잔뜩 선택하고 더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만다.

딱히 누구를 탓할 수 없다.

내가 충분한 애정을 주지 못 했으니 생긴 일일 뿐.

 

나는 더 이상 새로운 친구를 적극적으로 사귀지 않으니 이미 시든 애정만 친구 창에 가득하다. 하지만 그런 일로 기분 상할 이유는 없다고 나는 알고 있다. 소중한 친구는 이미 있고, 이미 충분한 고민을 해봤다. 인스턴트 관계가 내게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쟤가 마음에 드는데 쟤는 더 이상 나를 선택해 주지 않는 모습을 보는 일, 내게 관심 없는 사람만 가득하단 사실을 피부로 느낄 때마다 영 기분이 좋지 않다. 다른 사람의 삶을 보며 부러워 우울해할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이 너무 잘 살면 배 아픈 일처럼.

아는데도 기분이 좋지 않다.

 

이를 해결하려면 새로운 친구를 다시 잔뜩 사귀면 된다.

그러면 초기의 관계에서 뽑아먹을 수 있는 긍정적인 감정은 충분히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미 한 사이클 경험해 본 내 입장에선, 그게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기존 관계를 튼튼히 하며 잘 유지한 사람은 친구 조금 늘어도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나처럼 무작정 늘리면서 쾌락만 맛볼 뿐이라면 언젠가는 쇠퇴기는 온다.

자신의 마음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새로운 친구를 자꾸만 사귀어봐야 공허하기만 할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

 

쇠퇴기에 들어선 후 내가 느끼는 가장 안타까운 생각은.

그간 내가 얻은 호감이나 인기가 크게 의미가 없었던 무언가가 아닐까 하는 의심.

처음엔 내 변화로 인해 얻은 감정이라 생각했는데, 그저 초기의 관계가 많아 내 단점을 모르고 내 장점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제대로 모른 채 전해줬을 뿐인 좋은 감정 아니었을까? 시간이 지나고 나를 조금 더 많이 관찰한다면 내 단점을 잔뜩 발견하고 원래대로 돌아갈 뿐인 착시 아니었을까.

여전히 나는 매력 없는 사람 아닐까. 관계의 현상에서 좋은 감정을 조금 뽑아먹었을 뿐인 기생충 아니었을까. 나는 선택받지 못 할 정도로 여전히 매력 없는데. 인기인 누구처럼 인간의 본질적인 매력이 있어야 그게 진짜 인기지, 관계의 현상 속에 기생해서 초기에 얻을 수 있는 꿀물 조금 얻어먹었다고 그게 인기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됐던 게 아닐까?

여전히 난 못난 사람인가?

 

쇠퇴기는 자존감을 떨어뜨린다.

문명 6에서 황금기로 플레이하다 정상기나 암흑기로 플레이하면 답답해 뒤질 거 같은 일처럼.

나는 분명히 많이 변했고 예전보다 더 나아졌음이 분명한데, 내 자존감은 작년 겨울 만큼 좋지 않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황금기의 단맛에 중독되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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