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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관계의 무게와 책임 [VRChat 보고서 38편]

by 심해잠수부 2023. 10. 26.

VRChat 보고서 15편: 하렘 순애는 순애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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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 행위가 요즘엔 불편하다. 좋아해달라고 한 적도 없고, 왜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내가 쌓아온 행동의 결과로 나를 좋아한다니. 게임이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취급하기엔 너무 무거운 마음도 있다.

처음엔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면 나도 좋았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좋다. 하지만 마냥 좋지는 않다. 좋으면서도 불편하다. 멋대로 좋아하고 멋대로 실망하고 멋대로 싫어할 뿐인 감정일 테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들인 노력 만큼 보상받길 바라고, 좋아하는 감정이라고 해서 예외로 두진 않으니까.

좋아하는 감정을 받을 때야 좋아도, 자신의 좋아하는 감정에 내가 보답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게 실망하면?
그 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받아줄 마음이 전혀 없는데, 그저 나를 좋아해 주는 만큼 잘 대해주고 싶을 뿐인데, 상대를 받아주지 못 한다면 벽을 치고 멀리 하는 게 옳은 행동이라니? 억울한 마음도 있다. 나는 처음부터 '좋아해 줄 수 없다', '좋아해 주기 어렵다', '한계가 있다'고 말했는데도 치고 들어온 건 상대방 아닌가? 왜 내가 실망했다는 감정을 받으며 죄책감을 느껴야 하지?

내가 정말로 어장 관리를 하고 있는 건가?

진지한 태도로 좋아해 주는 사람에겐 정말로 미안하다.

친구인 채였다면 오히려 즐거웠을 것만 같아.

 

여기까지 말하면 과몰입 등의 감정을 말하는 거 같겠지만, 친구도 다르지는 않다.

내 호의에 관심을 가지고 나와 친해지려는 듯 하는 행동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나는 그대의 감정을 받아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나에게 관심을 보이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꼬리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와도 나는 강아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아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데. 쓰다듬어 주길 바라며 헥헥거리는 강아지의 얼굴은 처음엔 초롱초롱하다가도 나중엔 이내 풀이 죽겠지. 그리고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 않겠지. 다가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짓밟았다며 나를 싫어하기도 하겠지.

나는 잘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왜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야 하지?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면 마냥 좋아할 일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이젠 그런 생각을 하지 못 하겠다.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고 멋대로 싫어할 뿐이다.

멋대로 기대하며 나를 좋아할 때야 달달하니까 좋을 수 있다. 하지만 멋대로 실망하고 멋대로 싫어한다. 책임 없는 쾌락은 없다. 쾌락엔 항상 책임이 따른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주니 나도 좋기는 했지만, 날 좋아하는 감정에 충분한 보답을 해주지 않으면 오히려 더 나쁜 관계가 되어버린다. 결과적으로 실이다.

재밌는 사람인 거 같아 관심을 가지고 내가 자주 찾아가서 인사 몇 번 했는데 갈 때마다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면 나는 어떻게 생각할까? 싹바가지 없는 새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야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관심을 가졌는데 자꾸만 자기 분위기를 헤치는 말을 하면 나는 어떻게 생각할까? 재미없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 친구도 자기가 좋아하던 여자애가 자기를 좋아해 주지 않으니, 나중엔 술자리에서 걘 썅년이라고 그랬다.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찾아가지도 않고 인사도 하지 않아 친구의 친구로 잘 지냈을 텐데, 괜히 좋아해서 적극적인 행동을 하고 나쁜 생각을 하고 만다.

내게 접근하는 상대의 감정이나, 접근하는 이를 바라보는 내 감정이라고 다를까? 똑같다.

내가 도킹한다고 도킹 다 받아주는 사람도 아닌데, 내가 거절했다고 혼자 기분 나쁜 티 은근히 내며 친구들 사이에서 내게 몇 마디 툭툭 던지면 내 기분도 더럽다. 내게 기대를 안 했으면 아무 일 없이 잘 지냈을 텐데. 왜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고 상대방에게 더러운 감정을 전해주고.

 

반년 전엔 내가 혼자 인스턴스 파고 있으면 친구가 왔으면 좋겠다 싶었다. 요새는 잘 모르겠다. 오길 바라는 마음이 없진 않지만 놀고 싶은 사람은 정해져 있고(그래서 인바/리퀘 보내면 그만이고), 그 외의 사람은 나도 잘 모르겠다. 누구나 출입할 문을 만들어 두고 정작 책임을 느껴서 피곤하게 여긴다니 나도 참 양심도 없지.

하지만 초록불을 하고 있으면 무작위로 온다.

심심해서 인스턴스 돌고 있는 친구도 오고, 친해진 지 얼마 안 된 친구도 오고, 사이 소원해진 친구도 친구 따라서 오고, 내 기분 긁는 친구도 오고, 개시팔 나는 창녀가 아닌데 자꾸만 친구랑 대화하고 있는데 무턱대고 가슴 만지면서 내 반응 관찰하려는 세상 피곤한 친구도 온다. 랜덤 가챠처럼.

자기네끼리 잘 놀면 나를 보러 온 게 아니니 (내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니까) 별 생각 안 들 텐데, 내가 아는 척도 하고 신경 써줘야 할 거 같은 사람도 분명히 온다. 내게 조인해서 나와 대화하려고 오는 사람도 분명히 온다. '나를 보러' '굳이 내게' 온 사람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게 안부 인사든 진짜로 나랑 놀고 싶어서든 간에.

나를 원하는 건 분명 호의고 좋은 감정이라 절대 싫지 않지만, 내가 받는 호감엔 책임이 따른다.

대화를 걸면 대화도 받아줘야 하고 시간도 써줘야 한다.

그래서 옆에서 대화하던 친구가 나를 계속 기다리느라 시간을 허비하거나 감정적으로 섭섭할 수 있다. 나는 B와 조금 놀면서 가끔 찾아오는 사람 있으면 안부 인사만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C, D, E 등의 사람이 너무 자주 찾아오거나 한 사람이 아예 내 옆에 붙어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으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정작 B에게 소홀해져 버릴 수도 있다.

VRC와 현실을 구분하는 아주 큰 요소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선 특정 친구와 놀 때 (누가 데려오는 게 아닌 이상) 다른 친구의 간섭을 받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으니까. 열어두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게임적 특성으로 발생하는 문제니까. 인바방에서만 노는 게 이상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게 현실에 더 가까우니까.

누군가는 내 성격이 꼬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라고 해서 (상대방에게) 다를까?

나는 모두가 겪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조인을 자주 타는 편인데, 상대도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수 있다. 굳이 찾아와 자기에게 말을 거는 나를 어쩔 수 없이 신경 써주며 대화하며 피곤하다고 여길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사람 없는 거도 아니고. 나와 친했던 사람들조차 이젠 나를 피곤해할 때도 있겠지. 나도 그렇고.

 

가끔은 '나란 존재가 10명 100명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싶다.

그렇다면 내게 감정을 쓰는 사람에게 최대한 시간을 들여 받아줄 수 있을 텐데. 예전에 그렇게 다른 사람 원할 때는 내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어 답답했는데 이젠 다른 사람이 많아서 답답하다니 이게 무슨 우스운 상황이니.

모든 친구와 잘 지내면 참 좋겠지만, 확실하게 이젠 말할 수 있다.

그건 불가능하다.

신경 쓰려고 노력할 수야 있지만, 누군가에게 자원이 투자되면 또 다른 누군가는 자원을 투자받지 못 한다. 내가 상대를 아무리 아끼고 신경 쓴다고 쳐도 내가 투자한 비용이 작다면 상대가 나를 높게 쳐주지 않는다. 나는 많은 사람과 잘 지내고 싶은데 내 마음이 어떻든 간에 내가 투자한 실제 비용만큼만 돌아온다.

쉽지 않다.

관심은 받고 싶은데 책임을 지지 않으면 관심이 꺾이는 모습을 봐야 해서 관심이 싫다니, 정말 피곤한 생각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자기가 무슨 책임을 지는지 알지도 못 한 채 대충대충 즐겁게 노는 사람도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지낼 수 있다고 해서 현상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엔, 누군가에게 호감을 받는 일엔 내가 아까 말했던 거대한 책임이 뒤따른다.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르고, 책임을 소홀히 하면 호감이 아니라 비호감만 축적될 뿐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받지 않았다면 그런 일도 없었을 텐데,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에 나무처럼 서서 똑같이 있을 뿐인데 누군가가 좋아했다가 실망했다가 싫어했다가 마음대로 취급한다. 실망하는 모습도, 싫어하는 모습도 받고 싶지 않지만 내가 쓸 수 있는 자원은 한정적이다.

옛날부터 인기가 많았던 저 친구는 혼자서 어떤 고독한 싸움을 하며 살아왔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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