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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적은 시간 많은 친구 [VRChat 보고서 33편]

by 심해잠수부 2023. 9. 5.

<VRChat 보고서 15편: 하렘 순애는 순애가 될 수 없다>에서 친구의 수와 시간에 대해 짧게 얘기했었다. 그 때의 관점과 지금의 관점은 조금 바뀌었다. 저 때는 한 명의 친구와 그룹 내에서 2시간씩 노는 일이 당연했고, 친구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아 그런 기준이 좋지 않을 수 있다는 부분을 간과했다.

글을 올린 뒤 반년 가까이 지나고 내가 느끼는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VRC 플레이스타일에 따라 15편에 극히 공감하는 사람도 있고, 공감하지 못 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VRC를 하루에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은 4시간이다. 백수든 직장인이든, '가장 유저가 많이 들어오는 시간'이 가장 재밌다. 그 시간은 다들 할 거 다 하고 저녁까지 다 먹은 시간인 20시부터 자러 가기 시작하는 24시까지. 이렇게 4시간이 가장 재밌고, 요일은 불금을 시작으로 한 금토일이 가장 재밌다. VRC 뿐만 아니라 모든 게임 특징이겠지만.

그런데 친구가 만약 100명 있다고 가정하면, 100명을 4시간 안에 다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100명 중 50명만 접속했다고 쳐도 50명조차 4시간 동안 올바르게 시간을 분배할 수 없다. 50명이 아니라 20명이어도 생각보다 빡세다.

과거에 "내가 4시간 모두 친구에게 쓸 수 있어야 한다(하렘 순애는 없다)"는 뉘앙스로 말했던 이유는, 40명의 친구가 있고 30명이 접속해 있고 20명이 그룹에서 초록 불로 있으면 40명 모두를 한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룹에 있으면 20명이 해결되고 나머지 10명도 알아서 유저 많은 인스턴스에 찾아온다). 덕분에 몇 명과 바깥에서 따로 만나도 충분히 시간이 남아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친구가 40명의 2배인 80명만 있어도 그 중에 20명만 접속해도, 20명이 전부 서로 다른 그룹이라면(한 공간에서 대규모로 볼 수 없다면) 시간을 쉽게 분배할 수 없다. 20명을 봐야 하는 유저에게 한 명의 유저와 1시간이나 본다는 건 '가벼운 투자'가 아니라 '엄청나게 커다란 투자'다.

내 환경이 바뀌니 내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하루에 10분이라도 얼굴을 본다면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하루 4시간 꼬박 투자해도 하루 동안 그리 많은 친구와 만날 수 없으니까. 누군가가 나에게 10분'밖에' 투자하지 않는 게 아니라 10분'이나' 투자해 준다고 여기는 게 옳다.

물론,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건 아니다.

유저의 성격과 배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15편을 썼던 내가 투자한 2시간'과 '33편을 쓰는 내가 투자한 2시간'은 너무 다르다. 그 때는 누구에게나 2시간을 충분히 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웬만큼 좋아하지 않고서야 하루에 2시간이나 쓰기는 힘들다. 하루 20분도 생각보다 힘들다.

내가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VRC 4시간 중 2시간이나 좋아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유저에게 써야 한다니? 2시간을 감당하고 나머지 남은 2시간(120분) 동안 내가 좋아하는 친구 10명을 모두 보려면 한 친구당 12분 이내로 끊어야 한다.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점점 냉정해진다.

예전엔 그렇게 재미있지 않더라도 갈 곳도 딱히 없으니 무료하게 의미 없는 이야기 1시간씩 2시간씩 멍하니 할 수 있었어도, 지금의 나는 시간을 최대한 재밌게 알차게 보내고 싶다.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행동에 시간을 과투자하고 싶지 않다.

애매하게 무너져 가는 관계를 굳이 찾아갈 이유도 없고, 가봐야 불쾌한 얘기만 하는 친구를 굳이 찾아갈 이유도 없고, 나 싫다는 유저나 내 뒤에서 나 우습게 취급하는 친구를 찾아갈 이유 없고, 내게 배려를 전혀 해주지 않는 친구도 찾아갈 이유가 없다.

관계가 멀쩡하더라도 단순히 재미가 없어서 찾아가지 않을 수도 있고, 최근에 너무 많이 봐서 오늘은 다른 친구에게 집중하고 싶어 찾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은 게임 월드에서 놀고 싶을 수도 있고, 오늘은 월드투어를 하고 싶을 수도 있고, 동시 시청을 하고 싶을 수도 있고, 다른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있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과몰입이 생겨서일 수도 있고.

친구가 과몰입 시작했을 때 '친구가 친구(나)와 놀지 않는다며 불평하고 걔 행동 문제 있다'고 뒤에서 험담하는 유저를 가끔 발견한다. 하지만 과몰입 같은 뜨거운 관계가 생겼을 때 둘이 붙어있으려면 친구는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가장 소중한 관계에 시간을 많이 쓰고 싶어 하는 건 아주 당연한 현상이니 불평할 이유가 없다.

과몰입에게 잔뜩 붙어있는 행동이 문제라면, 이젠 재미없다는 이유로 친구에게 예전처럼 관심 가져 주지 않는 행동이나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특정인에게 시간을 쓰지 않는 행동도 똑같이 문제가 있다.

친구를 차별하는 일이나 과몰입이 생겨 친구에게 신경써주지 못 하는 일이나 똑같은 마음이 원인이니까. '좋아하는 친구에게 시간을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의 결과가 드러나고 있을 뿐이니까. 같은 원인으로 발생하는 행동일 뿐이니까. 그저 지금 당장 많이 좋아하는 친구에게 줄 시간이 부족할 뿐이니까.


당연히, 반대 유형인 '친구는 적고 시간만 많은' 유저도 있다.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 하는 유저가 친구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친구가 많은 유저는 많은 친구를 적은 시간에 할애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친구가 많지 않은 유저는 많은 시간을 적은 친구에 할애하기 위해 애를 쓰니까.

 

최근엔 2시간씩 3시간씩 놀자며 내게 붙어있는 행위가 힘들 때가 있다.

나도 텐션이 높고 마냥 재밌을 땐 괜찮지만, 내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아 괴로울 때도 있다.

월투를 가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내게 월투를 가자고 하거나, 저댄을 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하자는 듯 끌고 가거나, 깊은 대화를 지금은 하고 싶지 않은데 깊은 대화를 하고 싶다거나, 적당히 오랜 시간 같이 있었던 거 같아서 조금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거나, 저기 지금 아무리 봐도 존나 재밌는 인스턴스가 열린 거 같은데 안 갔으면 좋겠다고 말해서 옆에 있어 주거나, 저녁 7시에 대뜸 브수면을 하자며 오늘도 내일도 모래도 (가장 핫한 그 시간에) 같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땡깡을 부리거나, 내가 있는 공간에 자꾸만 내가 불편해하는 유저 혹은 꼴 보기 싫은 유형의 유저를 데려오거나.

가장 재밌는 시간에 다른 재밌는 걸 포기하고 여기에 시간을 쏟아야 한다니.

예전에, 군대 간다는 친구에게 '이제 우리가 같이 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자주 보자는 듯이 자꾸 어필했던 내가 부끄럽다. 걔가 군대를 앞둔 시점이라 시간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어울릴 친구가 잔뜩 있는 친구에게 내가 자꾸만 나랑 놀자고 어필했던 과거가 부끄럽다. '이제 더 못 보니까 더 많이 봐두고 싶다'는 내 욕심 때문에 내게 많은 시간을 투자해달라며 무리한 요구를 염치도 없이 했구나.

 

일반적으로, 인기 많은(친구 많은) 친구와 가까워지고 싶을 때 20시부터 24시까지의(조금 넓게 보면 18시부터 02시까지의) 시간을 공략하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다. 그는 어울릴 친구가 너무나 많다.

그를 공략하고 싶다면 친구가 적은 아침 시간, 낮 시간을 공략하는 게 좋다.

그 때는 대부분의 유저가 오프라인이고, 아무리 인기가 많은 유저여도 선택지가 많지 않기 때문에 재미없는 얘기를 하는 내게도 시간을 많이 내어준다. 친구가 그 때 들어온다면의 이야기지만. 내가 그 때 들어갈 수 있다면의 이야기지만.

오후 2시에 가장 인기 있는 사람에게 "20시는 피하고 오후 2시를 노리라고 그랬지?"라고 잘못 해석하고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절대적인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시간보다 친구가 많은 시간엔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지만, 친구보다 시간이 많은 시간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다는 얘기일 뿐이다.

내가 친구 없어 심심할 때, 내가 친구 없어 얘라도 보고 싶을 때 인기 있는 친구를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일 뿐이다.

만날 친구 다 만난 뒤 이제 심심하다고 해서, 오늘따라 좋아하는 친구가 많이 들어오지 않아 쓸쓸하다고 해서, 20시지만 딱히 여기서 노는 게 재미없어 다른 친구를 보고 싶다고 해서, 내가 친구가 필요할 때마다 친구를 볼 수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과몰입처럼 서로 뜨겁다면 서로에게 언제나 전력투구겠지만, 평범한 친구 관계에선 이상 다들 자기만의 계획이 있다.

내가 비는 시간에 만나고픈 친구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니라,
친구가 비는 시간에 내가 찾아야만 친구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나도 내 시간이 있고 내 할 일이 있고 출근해야 하는데 새벽에 게임을 어떻게 하냐 낮엔 일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냐 억울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부얄에선 유사한 생활을 향유하고 있는 유저끼리 친하다. 같은 시간 축을 가지기 쉽고, 같은 시간 축 덕분에 많은 시간을 어렵지 않게 같이 보낼 수 있으니까.

바쁜 오후 20-24시에 보지 않아도 언제든 재밌게 놀 수 있고,
재밌게 노는 관계니까 가장 핫한 20-24시에도 다른 유저 껴서 더 재밌게 놀고.

친구가 내게 전력투구해 주길 바라면 안 된다.

욕심부리면 안 된다.

하루 10분이어도 내게 정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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