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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유저가 폐사하는 과정 [VRChat 보고서 22편]

by 심해잠수부 2023. 6. 24.

일반적인 게임은, '게임'이 질리면 접는다.

노가다만 반복되고, 새로운 탐험도 없고, 캐릭터를 성장시켜도 보상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 우위를 가지며 뿌듯해하는 마음도 느낄 수 없고, 매번 게임이 똑같고 반복되는 경쟁전이 지속되는 등 개발자가 구현한 게임의 재미 포인트를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때 접는다.

그럼 처음부터 게임이 아니었던 VRC는 언제 접는가?

 

뉴비가 게임에 정착하지 못 하고 접는 경우(놀 사람이 없어 재미를 느끼지 못 하는 일, 여캐 아바타의 남자 목소리에 적응하지 못 하는 일)를 제외하고, VRC에 충분히 적응하고 몇 달 이상 즐겼던 유저가 접고 싶다고 느끼는 때는 언제일까?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는 "과몰입 깨졌을 때", "그룹에서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을 때(누군가에게 찍혀 그룹에서 밀려날 때)", "친했던 친구와 틀어졌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 케이스의 공통점은, 지금까지 게임을 재밌다고 느꼈던 요소인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서 재미가 한 순간에 스트레스로 뒤집어졌다는 점이다. 나쁜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나쁜 관계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로감, 배신감 등 마이너스한 감정을 잔뜩 느끼며 "내가 이 게임을 왜 해야 해?" 생각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내가 블루아카이브 한섭 런칭 초기에 엄청 열심히 했었는데, 두 번의 픽업 기간 동안 두 번 모두 천장 쳤다. 내가 지금까지 '잘 뽑아서' 편하게 게임을 했었는데, 편하게 재밌게 게임을 즐기다 천장 두 번 치고 엄청 실망했다.

'천장치는 일이' 당연해서 내가 이 게임을 완벽하게 즐기려면 (2주에 한 번씩 새 캐릭터가 나오니까) 매달 100만 원을 써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건데, 그 전엔 운으로 캐릭터를 잘 뽑아서 돈을 덜 써서 재밌다 생각하며 즐겼던 반면, 천장 두 번 친 순간 꼬와졌다.

지금까지 '잘 뽑아서' 재밌게 즐길 수 있었던 마음은 '못 뽑아서' 재밌게 즐길 수 없는 마음으로 한 순간에 뒤집혀 버렸다. "내가 이 게임을 왜 해야 하지?" 생각해서 이벤트 기간 동안 남은 청휘석 다 갖다 꼬라박아 캐릭터 파밍에 사용하고 (파밍에 꼬라박기 전엔 성장 차이가 꽤 났었는데) 모의전 1찍튀 하고 게임을 접었다.

게임의 재미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리니지가 돈을 많이 쓰는 게임이기 때문에 재밌을 수 있다.

리니지가 극악무도한 게임이지만, 내가 정말 운이 좋아 돈을 얼마 쓰지 않고 좋은 아이템을 얻었다. 리니지가 돈을 적게 쓰는 게임이었다면 좋은 아이템을 뽑아도 좋구나 하고 말 텐데, 리니지가 극악무도한 게임이기 때문에 좋은 아이템으로 이득 봤다는 생각으로 게임이 재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재미는 지속될 수 없다. 언제나 좋은 아이템을 뽑을 수 없고, 나중에 같은 재미를 느끼기 위해 돈을 썼는데도 좋은 아이템이 나오지 않아 손해 보면 그 때 느꼈던 재미는 사라진다.

공부와 같다.

부모에게 칭찬받는 일의 쾌감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도 종종 볼 수 있다.

성적이 오르면 부모에게 칭찬받지만, 성적은 무한대로 올라가지 않는다. 어느 수준에 올라가면 경쟁 수준이 치열해지고 성적이 잘 오르지 않는다. 400등에서 100등으로 올리는 일보다, 30등에서 20등으로 올리는 일이 더 힘들다. 노력해야 하는 양은 늘어났는데 보상은 적어지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30등에서 20등으로 올려봐야 부모가 보기엔 20등이나 30등이나 똑같다.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온다. 혹여나 네가 만약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나빠서 40등이 나왔으면 부모님이 이번엔 왜 떨어졌냐는 듯이 물어본다. 40등도 잘 한 건데 30등에서 10등이나 떨어졌으니 마치 무언가 잘못했다는 양 말하며 보상을 주지 않는다.

추남의 다이어트와도 같다.

추남이 다이어트를 할 땐 분명히 '살 빼면 잘 생겨지겠지. 긁지 않은 복권이겠지' 생각하며 노력하지만, 살을 빼봐도 성격은 개떡 같고 얼굴은 여전히 못 생겼다. 살을 뺐다고 인기가 많아질 리가 없다. 이전과 똑같은데 식욕을 참는 노력은 '꾸준히' 계속 해야만 한다. 결국 살을 빼봐야 똑같다는 생각에 노력을 포기하고 원래대로 돌아간다.

내가 살면서 봤던 사람 중, 다이어트 후 체중 유지를 잘 하는 사람은 긁었을 때 복권인 사람이었다. 누가 봐도 키도 크고 잘 생겼으니까, 살 빼기 잘 했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

때문에, 다이어트나 공부 같은 일은 '지속할 수 있는 관점'을 필요로 한다.

(공부)'등수를 올리고 싶다'거나 (게임)'티어를 올리고 싶다' 따위의 관점은 지속할 수 있는 관점이 아니다. 모든 일은 꾸준히 시간을 투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꾸준한 성장을 얻을 수 있는데, 등수를 올리고 싶다 티어를 올리고 싶다의 관점은 티어가 올라가지 않거나 등수가 잘 올라가지 않을 때 '내 주제에 무슨' 포기하기 쉬운 관점이니까.

 

VRC의 재미 요소가 저댄인 사람은 저댄이 질릴 때 접겠지만, 대부분의 유저는 관계에서 재미를 얻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게임에 있게 해줬던 요소인 '그룹' '과몰입' '친구' 등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현실의 인간관계에서도 싸우고 틀어지고 많은 일이 일어나는데, 게임에서 그런 일이 없을까?

게임에서 한 번 친해졌다고 영원히 아무 일 없이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잘못됐다.

VRC에서 만난 사람이 아니라, VRC를 시작하기 전 인간관계를 한 번 훑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연락을 덜 하고 안 부딪치는 사람과는 별 일 안 생기지만, 회사에선 시도 때도 없이 서로 뒤에서 말 나오고 군대처럼 사람 모아두는 곳에선 트러블이 일상이다. 그런데 VRC에서 매일 저녁 4-6시간씩 만나는 사람이 트러블이 없고 영원히 친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

 

하지만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은, '모든 사람'이 '친해지는 과정'에 있다.

단점보다 장점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기간이다. 서로 어울리며 '좋은 점'만 느끼는 '봄 시즌' 구간이다. VRC에 붙어있는 많은 사람 중 '봄 시즌'에 재미를 느끼고 그 때의 매몰 비용(?)으로 게임을 접지 못 하는 유저가 생각보다 많다.

학교에서도 봄엔 반 친구와 다양하게 어울려 볼 수 있다. 특히 '이전 학년'의 영향을 잘 받지 않는 1학년 봄에는 정말 많은 친구를 찍먹(?)해 볼 수 있다. 내 학창 시절 가장 즐거웠던 시기도 중1 봄, 고1 봄이었다. 왜냐면 그 때는 서로 알아가는 시기고 서로를 크게 나쁘게 대할 일이 없고, '얘가 병신 같다'고 느끼기엔 부족한 시간이니까.

봄 시즌엔 서로 재밌는 얘기 하고, 노가리 까면서 지내다 보면 진짜 웬만해선 다들 호의적으로 즐겁게 지낸다.

하지만 3개월만 지나도, 점점 어느 정도 걸러진다.

성격이 더 잘 맞는 친구와 더 적극적으로 붙어 있게 되고, 성격이 덜 맞는 친구와는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서 생긴 내 이미지,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생긴 친구의 이미지 등으로 서로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초기에 엄청 친했어도 어느 순간부터 '반 친구' 정도의 관계로 된다.

이 때 엄청 친한 그룹은 3명 정도 자주 붙어 다닐 테고, 친하다고 하기엔 애매한데 그렇다고 사이가 나쁘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서로 같이 밥 먹는 사이인 점심시간 친구도 있을 거고, 그리고 용건 없으면 딱히 말 할 일 없는 친구 그런 식으로 나뉘어 돌아간다.

학교에서 친구와 어울리기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면, 대부분 가을 이후였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친구가 누군가를 따돌리거나, 누군가가 친구들 사이의 트러블로 안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는 항상 시간이 많이 지난 뒤였다. 특히 여름 방학 때 친한 친구끼리 많이 놀며 더 친해지고 덜 친해지고 그러한 과정이 심화되는 여름 방학 이후.

중학생 때 어떤 여자애가 친했던 그룹에 찍혀 책상을 뒤집어엎는 등의 일을 처음 본 시기도 동복을 입고 있을 때였고, 약간 노는 애들 사이에서 같이 놀던 친구 하나가 죽도록 맞는 일을 본 적도 동복을 입고 있을 때였으니까.

1학기 초엔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교사들조차 1학기엔 학생 관리를 잘 했다고 생각한다. 저 교사가 만만한지 조금 개겨도 되는지 개겨도 아무 일 안 생기는지 이런 걸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라 문제아 같은 친구도 대개 교사가 화를 내면 듣는 척이라도 했으니까. 하지만 '저 교사가 호구다'라는 이미지가 잡히고 나서는 '조용히 해달라'고 교사가 사정사정하고 부탁을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내게 다가와도 편견 없이 말하고 들으며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고 게임을 알아가는 시즌인 '봄'과, 서로가 서로의 단점을 파악하고 게임의 장단점이나 특징도 파악하고 특정 행동에 따른 편견도 가지며 다른 사람을 거부하거나 밀어내는 '가을'로 나뉜다.

봄이 즐거웠다면, 봄이 즐거웠던 만큼 가을도 강하게 찾아온다.

아바타를 보며 누군가와 대화하고 서로에게 쉽게 호감을 느끼며 친해지는 일이 즐거웠어도, 시간이 지나고 결국 사람은 다 똑같고 사람 사는 공간은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하며 아주 평범한 상태로 돌아갈 테니까.

매일 보던 사람과 즐겁던 나날이 매일 보니까 질리고 힘들고, 누군가와 트러블도 생기고, 별 거 아닌 일로 섭섭해하고 별 거 아닌 일로 섭섭해하는 사람을 보며 피곤해하고, 내가 누군가에게 집착해서 상대를 힘들게 하고 상대가 내게 집착해서 나를 힘들게 하는 등 하루하루가 피곤한 상태로 넘어갈 테니까.

초기에 어떠한 친구와 어떠한 그룹과 친해지는 과정을 겪고 재미를 느꼈다면, 반대로 어떠한 친구와 어떠한 그룹과 멀어질 때 폐사하기 쉽다. 처음에 관계를 맺는 일이 재밌어서 게임에 붙어있었다면, 나중엔 관계를 맺기 때문에 게임에 붙어 있고 싶지 않게 된다.

한 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겪는다.

알아가며 즐거운 봄, 뜨거워서 좋았던 여름, 푸르렀던 잎이 떨어지는 가을. 뼈만 앙상하게 남아 외로운 겨울.

 

한 번의 계절을 겪고 나면, 이 게임에서 계절을 만들어 가는 건 '환경을 받아들이는 자기 자신'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어떤 그룹이 좋았다가 이젠 온갖 트러블이 터져 그지 같아도, 여전히 놀 사람은 많고 놀 그룹도 많다. 여전히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적은 노력을 들여 여전히 잘 지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저는 이전처럼 그룹에서 놀길 바라며 새로운 사람도 찾지 않고 새로운 인스턴스를 탐험하지도 않는다. 가을을 거치며 상처 입을 만큼 상처 입은 유저는, 마음의 문을 닫는다.

가을 겨울을 겪으며 '언제 또 퍼블릭 돌아다니며 새로운 사람을 찾고 또 친해지나' 싶기도 하고, 접속해 봐야 매일 피곤한 일만 터지는 (이전의 관계 문제를 완결 내지 못 한 상태에서) 이 게임에서 또 무언가를 노력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해서 그만둔다.

그렇게 세계에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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