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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엔드 게임 [VRChat 보고서 17편]

by 심해잠수부 2023. 4. 18.

VRC의 플레이 시간이 늘어날수록 '친구 그룹'으로 엮인 관계는 족쇄로 변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한 노력은 힘들어서 하기 싫고,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익숙한 그룹에서 영원히 머물길 바란다. 하지만, 그룹의 유저는 시간을 축적할수록 흥미를 잃고 떠나간다. 떠난 자리는 채워지지 않고 고여간다. 그룹은 백색왜성처럼 힘을 잃고 추억만이 밝게 빛난다. 

재방송을 보는 듯 다 아는 듯한 게임의 재미는 나를 움직이게 만들지 못 한다. 

친구 하나를 사귀려 해도 리트머스지를 갖다 대듯 대화조차 하지 않은 채 아바타만 보고 바이오만 보고 목소리나 말투 조금 보고 사람을 판단하며 친해지기를 꺼린다. 생각 없이 친추를 하고 받던 유저는 사라지고 나중에 삭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친추조차 쉽게 보내지 않고, 받을 때조차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내가 타인을 살갑게 대하기엔 내가 상대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 하고, 타인이 나를 살갑게 대하기엔 상대가 내게 흥미를 느끼지 못 한다. 동영상 플레이어에서 나오는 음악 하나로 즐겁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음 오 아 예 그렇구나 정도의 추임새밖에 넣지 못 하는 무미건조한 유저가 되어버렸다.

누구의 탓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늙어버리듯 고여버린 유저들. 몸에서 나는 썩은 내는 실제로 나는 냄새가 아니지만, 나의 행동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썩은 내. 음식이 되기엔 썩어버렸고, 누군가가 다가오기엔 모습도 냄새도 불쾌하기만 한 짬통이 되어버린 유저. 

습관처럼 들어오는 게임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 한다. 가망이 없는 게임인 듯 자포자기하며 접어야 할 게임처럼 느껴진다. 매일 보는 친구의 썩은 내에, 매일 보는 풍경의 썩은 내에, 게임에서 풍기는 악취는 더 이상 게임을 게임처럼 만들어주지 않는다. 

가망이 없다.

 

하지만 게임은 그 때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 

게임을 즐기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 

개발사가 제시하는 하나의 방법대로 즐기는 게임이 많지만, 대항온 같은 게임은 방향이 다르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이 유료에서 부분 유료화로 바뀌었을 때, 정말로 많은 유저가 대항온에 유입되었지만 인기는 반 년을 가지 못 했다. 개발사가 제시하는 방향이 매우 적은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게임을 오래 즐기는 유저는 그 게임 내에서 자신이 즐기는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까지 즐겨야 할 게임이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더 많은 재밌는 게임이 있는데 굳이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다만, '게임 전체'를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친구 그룹'만 보며 게임의 재미를 평가하고 있지 않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따져보면 '처음부터' 게임이 아니었다.

개발사가 제시하는 게임의 방향은 '처음부터 없었는데', 처음 유입되어 흥미를 느꼈던 자신은 무얼 즐기며 행복해했던 걸까? '게임이 아니라' '그 때의 친목 그룹의 분위기'에서 재미를 느꼈던 거겠지. 

하지만, 그룹은 끝. 

바뀌어버린 현실을 인지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한다. 

 

백색왜성의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 

와해된 그룹은 더 이상 서로를 끈끈하게 잡아당기지 못 한다. 힘을 잃고 추억만 빛나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그룹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백색왜성에 남아도 그룹은 없다. 익숙한 친구의 손을 붙잡아선 안 된다. 

블랙홀의 손을 잡아서도 안 된다. 

주변에서 친구를 빨아들이며 세력을 키워가던 블랙홀도 나를 만족시킬 수 없다.  블랙홀에서 재미를 느낄 만한 유저였다면, 아직까지도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 백색왜성이 될 때까지 버틴 유저가 갈 곳을 잃고 블랙홀로 몸을 던져봐야 실망할 미래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익숙한 친구의 흔적을 따라가선 안 된다. 

우리가 가지 않았던 새로운 행성은 항상 우리 옆에 존재하고 있다. 

파란 불로 항상 혼자 타인을 기다리는 듯 보이는 부담스러운 방일 수도 있고, 지금까지 어딘가에서 자주 마주쳤지만 호감이 가지 않아 단 한 마디도 섞어보지 않은 친구가 있는 방일 수도 있다. 잘못 날린 손 인사에 친해지고 말을 트는 관계처럼, 깊게 고민 하지 않고 저지른 행동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게임을 재방송처럼 느껴 만들어낸 편견과 식은 흥미로 리트머스지 갖다 대듯 분별하고 피해왔던 게임의 상황이, 사실은 더 재미있는 상황이 될 만한 실마리였던 걸지도 모른다. 둘이 대화하는 일이 부담스러워 보여도 말을 하고 나면 생각보다 잘 맞을 수도 있고, 그렇게 대화하다 하나 둘 조인타고 시간 맞춰 놀다 보면 그룹처럼 변할 수도 있다. 

 

재미가 없는데도 친구 그룹에 묶여 재미를 찾으려고 해선 안 된다. 

이미 가족처럼 느껴지는 친구가 새로이 여행을 떠나야 할 유저의 다리를 붙잡는 족쇄가 되어있는 걸지도 모른다.

한 달에 3-4번도 안 만나는 친구와, 게임 내에서 저녁마다 3-4시간씩 만나 대화하는 사람의 자원 소모 속도는 차원이 다르다. 실제 친구가 소모되는 속도와 VRC의 친구가 소모되는 속도의 차이는 너무나 다른데, 현실 친구 대하듯이 친구의 익숙한 모습에 매달리면 안 된다. 

소모된 관계는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재충전되는 동안 다른 더 재밌는 곳을 찾아 여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잠시 여행을 떠날 사람을 붙잡지도 말아야 한다. 친구가 떠나는 듯 보여 아쉬워 보여도 친구가 계속 게임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놓아주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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