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군대를 현역으로 다녀온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당시 성격(이라기보다 사회성)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군대는 나와 배경이 다른 정말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잘 어울려야 하는 공간이다. 많은 사람과 많은 일을 겪는다. 그리고, 걔네가 내 처음 이미지만 보고 병신이라 생각해서 손절하고 싶더라도 나와 계속 같이 보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실패했어도 꾸준히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고 계속 시도하다 보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얘가 병신인 줄 알았는데 나쁜 애는 아니구나? 반대로 그지 같은 놈도 손절 치고 싶지만 계속 봐야 하므로 평소엔 절대 다시 안 봤을 사람에 대한 경험치도 강제로 먹게 된다.
시행착오 겪으며 꾸준히 반복할 수 있고,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있다.
그 때 살면서 처음으로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나는 그래서 찐따 친구가 군대 빼는 걸 좋지 않게 바라본다.
자기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자기 발로 걷어차는 일이니까.
내가 군대에서 겪었던 경험은, 학교 12년 다니면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경험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싸, 리얼충 등의 단어로 표현하는 친구들은 학교에서 이미 다 배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이미 중학생 때 완성형이 된 친구들도 많다. 걔네는 굳이 군대 가서 배울 필요가 없다. 걔네에게 군대는 오히려 자기 증명의 장소지. 에이스 취급 받는.
그런데 나 같은 찐따 친구의 삶은 뻔하다.
학교 다닐 때 취미나 성격의 결이 유사한 친구 두 명과 한 그룹을 이루어 매일 붙어 다니는 삶. 밥 먹을 때나 반 친구들과 우르르 가서 같은 그룹인 양 먹지, 쉬는 시간엔 항상 놀던 친구 몇 명과만 노는 삶. 그 긴 점심시간에도 항상 똑같은 친구랑만, 체육 시간에 체육 프로그램 참여하지 않고 벤치에 앉아 같은 씹덕 친구랑 씹덕 얘기나 하는 삶.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반이 바뀌고 학교가 달라져도 크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러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방법을 배우는 시기에, 항상 똑같은 선택만을 하며 지낸다. 취미가 비슷하거나, 성격의 결이 비슷한 친구와 1년을 같이 어울리는 일. 그 외 다른 친구들과는 용건을 말하거나 가벼운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친하게 지내지는 않는 삶.
그러다 대학에 가면 아싸처럼 지내고. 아싸처럼 지내더라도 동창은 또 있으니까 친구가 없는 건 아니지. 고등학교 무탈하게 졸업했으면 고등학교 3년 보면서 오래 봤던 친구 5명 정도 있는 삶이니까.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거 아냐? 다들 이렇게 지내지 않나?
그런데 쌓인 경험치가 너무나 부족하다.
많은 사람과 어울리며 시행착오 겪으며 경험 쌓아야 할 시기에 자기 선택으로 죄다 발로 찼으니까.
내가 그랬다 보니, 군대 가서 강제로 주입 당한 경험치는 꽤나 쏠쏠하게 작용했다.
그 나이 처먹고 그 때가 되어서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과 '걔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좋아하는 친구가 나를 깨워서 놀자 그러면 30분밖에 못 잤어도 나는 기쁘게 놀 수 있지만, 누군가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깨워도 30분밖에 못 잤으면 짜증 내거나 놀기 싫다며 자러 갈 수도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으니까.
(당시의) 내가 톡 답장 칼 같다고 남들이 나한테 칼 같아야 할 필요는 없구나. 날 싫어해서 그러는 게 아니구나.
이미 누군가는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배운 걸 텐데.
그 외에도 나중엔 잘 지내는데 처음엔 왜 나를 싫어하는지, 이렇게 나대는 열 받는 새끼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내 책임이 아닌데도 다른 사람을 위해 욕을 먹을 때 가져야 할 마인드 등 그 외에도 정말 많은 무언가를 경험하고 나왔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이 그렇게까지 낭비 같진 않았다.
진짜 개병신이었는데 살짝 덜병신 됐다고 생각해서.
물론, 그 뒤로 또 똑같이 좁은 사회에만 있는 일을 반복했으니 더 이상 변화할 일은 없었다.
회사에 가도 한 팀의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 부서 자체의 인원은 많아도 팀 단위의 인원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학교랑 똑같은 구조였다 회사는. '맨날 보던 사람'과 '그들만의 작은 사회'에서 '소규모'로 비비는 일은 내 성격 형성에 도움이 될 정도의 무언가는 아니었다.
인터넷 친구를 현실에서 종종 만나도 성격 취사선택한 사람이랑 맨날 똑같이. 성격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블락하고 손절하고 그만 보고. 현실 친구 관계든, 회사 관계든, 온라인 친구 관계든 학교 다닐 때처럼 스트레스 농도 안 높은 관계만 고기만 쏙쏙 빼먹듯이 먹는 삶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가 많지 않은 삶을 살았던) 찐따 친구가 군대에 가는 걸 빼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다. 별 고민하지 않고 시원하게 한 번 다녀오면, 그래도 도움이 되는 성격 변화가 분명히 있을 텐데 굳이 자기 '마지막 기회'를 발로 차고 있는 거니까. 갔다 와도 이상한 성격이었겠지만, 안 간 거 보단 간 게 확실히 낫다고 난 믿는다. 안 갔으면 더 최악인 성격이었을 거라고.
그리고 누군가에겐 정말 우스운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VRC를 하면서도 성격이 도움 되는 방향으로 많이 바뀌는 걸 느낀다. <VRChat 보고서 37편: 잃어가는 친구>에서 이미 말한 적이 있다. VRC 때문에 성격이 바뀌는데 '나만' 바뀌고 친구는 안 바뀌어서 기존의 친구와 점점 멀어진다는 이야기. VR 친구 조금 생기고 기존의 친구를 죄다 잃어가는 느낌을.
하지만 VRC가 긍정적인 방향에서 확실히 도움이 된다.
VRC의 플레이 행태가 군대와 똑같으니까.
보기 싫은 사람을 꾸준히 봐야 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항상 같이 있을 수 있는 걸 깨닫고 아니고, 내가 좋아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나는 싫어하는데 정작 나를 좋아하거나 잘 대해주는 사람이 있고, 내가 있는 그대로 얘기하면 오해하는 사람은 항상 있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잘 한다고 잘 풀리는 게 아니며 등등.
다른 사람이 개입하는 공간에서 관계를 맺다 보니 원하지 않는 사람과 엮이는 경우가 많으니까 정말 많으니까.
좋아하는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도 싫어하는 사람이 다 망치는 일이나, 좋아하는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친구를 더 선택하고 싶어 하거나 따위의.
그래서 원하지 않는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리고 원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이 개입하는 공간에서 더 잘 어울리려고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노력하다 보면) 바뀌어간다.
친구를 만나러 가면 친구의 친구는 존나 싫은 애가 있어도 친구를 보기 위해서는 맨날 만나야 하고,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서 친해지고 싶어 노력한 적 없는데 (항상 유사한 친구끼리 선택 아닌 선택해서 어울려 살아왔는데)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존나 싫어도 척지면 불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심스레 행동하기 시작하고.
시행착오를 정말 많이 겪고 과정에서 이미지 조지는 일도 정말 많이 일어나겠지만, 이미 과거의 실패로 취급되는 망한 인간관계가 지금도 나를 괴롭히겠지만, 그래서 멘탈 터지는 일도 많겠지만, 거지 같은 실패를 겪으면서 계속 바뀌어간다. 누군가는 게임을 접겠지만 만약 게임에서 살아남았다면 분명히 무언가는 바뀌어간다.
빠른 속도는 아니겠지만, 정말 천천히 느리게 꾸준히 바뀌어간다.
현생에선 여전히 나는 많은 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맨날 보던 사람과만 보니까 바뀔 일이 없지만, 게임에서 다양한 사람과 어울리면서 무언가 바뀌어가긴 하지. 고작 게임이긴 해도. 어느 공간이든 사람 사는 공간이고 거기서 배우든 여기서 배우든 확실히 무언가 바뀌어간다.
과거의 나를 보여주면 지금의 나 많이 좋아졌다 그러겠지. 날 싫어하는 사람들이야 "찐따 같은 니가 뭐가 바뀌어 바뀐 게 이거냐?" 싶겠지만, 2년 전에 내가 하던 행동과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정말로 많이 바뀌었는 걸.
근데, 문제가 있다.
성적으로 문란해지는 경우가 많고, 게임 하다 보면 죄다 암캐 되어서 크게 의미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거. 성격이 좋게좋게 둥글둥글 바뀌는 속도보다 키 180 190 십상남자들이 소녀처럼 행동하고, 이쁨받기 위해 발악하고, 소녀 같은 행동에 집착하며, 인터넷 친구에게 사랑을 느끼며 마음 아파하고 멘탈 터지다 우울싸개로 바뀌는 속도가 훨씬 빨라.
성격이 좋게 바뀌긴 하는데 좋게 바뀌는 만큼 다른 방향으로 사람이 점점 이상해져.
나는 내 친구가 말한 '인간 언저리가 되는 거 같다'는 표현을 꽤나 좋아한다.
'VRChat > VRC 보고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군가가 디스코드를 싫어하는 이유 [VRChat 보고서 76편] (0) | 2024.09.10 |
---|---|
친구 브붕이가 맨날 우울한 이유 [VRChat 보고서 75편] (1) | 2024.08.18 |
암캐끼리 과몰입 못 하는 이유 [VRChat 보고서 73편] (0) | 2024.08.06 |
음지와 양지의 경계 [VRChat 보고서 72편] (0) | 2024.08.04 |
인기와 유명세, 그리고 친구 [VRChat 보고서 71편] (0) | 2024.08.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