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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미분류

게임이니까

by 심해잠수부 2023. 11. 18.

VRC를 하면서 은근히 많이 들었던 말은, "게임이잖아."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이 예전부터 싫었다.

씨발 같은 행동을 하는 친구가 내게 "고작 겜인데 뭔 생각이 그리 많냐"고 할 때 처음 들었는데 그 때 기분이 영 그지 같았기 때문이다. 너랑 내가 게임 이전에 사람 대 사람의 관계고, 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관계를 고민하는 이유도 사람 대 사람이니까 고민하는 건데, 너가 다른 사람한테 초딩 새끼마냥 애 같은 행동하는 거도 게임이라서 그런 거였나? 싶어 처음 들을 때부터 기분 안 좋았다.

그런데 게임하면서 그 말을 은근히 많이 듣게 되더라.

고작 게임인데.

게임이잖아.

 

친구 하나가 고민이 있다며 말한 적이 있다.

현실에선 친구를 만나도 공허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데, 여기선 아무리 많은 사람과 어울리고 아무리 많은 친구와 어울려도 이상하게 공허하다고 기분이 이상하다고 그랬다. 나는 듣고, "사람에게 기대하는 게 많아서 그런가?" "사람에게 섭섭한 감정을 느낀다는 의미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되물었을 때 친구는 그런 말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고, 내가 이해를 못 하니 이야기는 흐지부지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그 친구가 무얼 말하고자 했는지 이해를 했을지도 모른다.

 

VRC 내에서의 관계가 정말 미칠 듯이 가벼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들에게 NPC보다 못한 친구가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게임' 하러 들어온 거고, 게임이니까 관계를 가볍게 대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안 그렇단 얘기가 아니다. 나도 내가 '소중하다'고 느끼지 않는 지나치듯 만나는 관계엔 정말 가볍게 대하고 있을 수 있다.

예전엔 그룹처럼 지내는 친구가 많았으니까 아무리 주옥 같아도 관계가 가볍다는 느낌을 받진 않았는데(자기들이 자기네들을 속박하고 있으니까), 요즈음엔 내 주변 환경이 서로 속박되어 있지 않으니 자꾸만 가볍다고 느끼는 거 같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조차 고작 거절 몇 번 당하면 끝난다.
누군가와의 친했던 감정조차 몇 주 몇 달 못 보면 멀어진다.

현실에서는 몇 주 아니 몇 달을 못 봐도 짧은 시간 동안 그리 많은 관계와 엮이지 않고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도 않기 때문에 소중한 관계로 남아 계속 이어질 수 있지만, VRC는 플레이하는 시간 내내 관계의 쾌락 속에 묻혀 관계 중독적인 삶을 살아가는 게임.

몇 주 전 그리 친했던 감정도 짧은 시간이 지나 쓰레기보다 못 한 감정이 되는 게임.

이 '게임'에 '관계'가 가지는 의미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 게임은 '관계가 주는 재미'만이 존재하는, 게임처럼 플레이적인 '재미'만 추구하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가져서 안 된다. 왜냐하면 게임이니까. 상대를 굳이 깊게 신경 쓰려고 하면 나만 바보가 되는 이상한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의미가 존재하긴 할까?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고 한들, 그가 바라는 건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의 관계가 주는 재미'다.

바보처럼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나'를 갈구한다고 착각하여 혼자 신경 쓰며 '나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래도 조금 잘 해줘야겠지?' 생각하며 내 마음 한 켠 자리 만들어 그에게 제공할 필요 없다.

어차피 금세 떠나간다. 굳이 내 자리 만들어 앉힐 필요가 없다. 걔는 클럽에서처럼 서서 춤이나 추면 그만인 건데 뭘 굳이 자기 집 탈탈 털어 장소까지 제공하려고 해.

예전이었으면 별 생각 없이 대했을 관계를,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 때문에 혼자 진지하게 생각하며 대해줘 봐야 자기만 바보가 될 뿐이다. 내가 과몰입 할 수 없어서 받아줄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혼자 과몰입하고 싶다 매달리며 내가 줄 수 없는 걸 제공해달라고 징징거리다 내가 끝까지 안 받아주면 혼자 지쳐 떠나는 딱 그 정도의 관계. 그런 사람들 정말 많다. 그런 식으로 대할 거면 뭐 하러 거기까지 감정을 표현하고 혼자 진심인 양 행동하나.

친구들을 대하는 감정은 딱 그 정도.

RPG 게임의 퀘스트 정도.

게임이니까.

 

최근 몇몇 친구들의 행동을 보고 정이 많이 떨어졌었다.

얘는 정말로 나를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구나. 게임 캐릭터로 보고 있구나. 아니, 게임 캐릭터로도 보고 있지 않겠지.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사람 정도. 그래서 친구 하나가 썼던 글은 신기했다. 혹시나 내 착각이었나? 정말로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고 있던 건데 나 혼자만 나쁘게 생각했던 건가.

그래서 기대도 했었는데.

내가 내 글을 이렇게 쓴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 바뀌겠냐. 나는 경박하고, 볼품없고, 초라한 사람인데 글로 내 생각을 포장하고 정리해서 상대에게 보여주고 상대가 그걸로 감동을 받았다고 해봐야, 나는 여전히 똑같은 사람으로 살아간다. 누군가가 자기 생각을 어딘가에 올리고 내 마음을 움직였다고 해서 그 사람의 행동이 바뀔까.

아니겠지 안 바뀌겠지. 그저 생각만 그렇게 했다는 거겠지 나처럼.

 

다른 사람에게 잘 해줄 자신이 없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행동에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나를 NPC보다 못 한 존재로 보는 사람에게 내가 굳이 마음 쓰고 상대가 가볍게 던지는 말 혼자만 진지하게 생각하고 굳이 내 마음속에 자리 만들어서 신경 써주려고 하는 행동을 내가 할 필요가 있나?

갈림길에 서 있다.

이제 이 정도 했으면 많이 한 거 같은데 졸업해도 되는 건지, 아니면 나도 걔네처럼 관계의 재미만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을 '게임이잖아?' 생각하며 가볍게 대하고 소모품처럼 사용하면 되는 건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관계에 집착하던 친구들'이 싫어 밀어내고 가볍게 만나다 보니 그런 사람들만 만나게 된 걸 수도 있으니까. 이 게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내가 만들어간 내 주변 환경의 문제인데 게임의 문제인 듯 말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고작 게임하면서 별 것도 아닌 일들로 혼자 이딴 고민하는 내가 누군가에겐 우스울지도 모른다.

근데 요즈음 게임하면서 매일 하는 생각이다. 정말로 매일매일 하는 생각이다. 최근 몇 주간 단 한 번도 이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요새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가사는 ' 아마도 너네들이 원한 거 난 못할 거야 그건 알아둬 난 거짓으로 네게 남아도 진심일 거야 걸어 모든 걸' 너네가 원하는 거 내가 못 해줬다고 너네들에게 거짓으로 남을지도 모르지만 난 항상 진심이야.

그래서 고작 게임인데 뭐가 그리 혼자 심각하냐는 말은 조금 그래.

너네가 나 대할 땐 게임이었겠지만 그걸 탓하진 않겠지만, 내가 게임이었던 적은 없는데. 모두에게 그랬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에 자리 한 켠 내줬던 사람들에겐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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