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VRChat/VRC 보고서

인스턴스의 도망자 [VRChat 보고서 103편]

by 심해잠수부 2025. 3. 11.

나는 인스턴스의 도망자이자 인스턴스의 방랑자다.

무슨 중2병이 좋아할 법한 단어만 골라 만든 표현이냐 싶겠지만,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유저가 그렇다. 우리는 언제나 인스턴스의 방랑자가 되기도, 인스턴스의 도망자가 되기도 한다. 판타지 소설 설정의 밤의 경비대 같은 뉘앙스라면 참 좋겠지만, 간지와는 거리가 멀다.

과거에 종종 말한 적 있다.

인스턴스에 입장했다고 끝이 아니라고.

인스턴스에 입장한 친구를 도와주어야만 친구가 인스턴스에 붙어있을 수 있다. 하지만 도와주는 과정에서 기존 대화하고 있던 친구가 밀려나기도 한다. 나와 그의 친구가 둘 다 아는 사이라 재밌게 잘 어울린다면 좋겠지만, 모두가 잘 어울릴 수는 없다. 그들이 배척하지 않았어도 대화 흐름에 섞이기 힘든 경우가 얼마든지 존재한다.

대화를 할 사람을 '선택'하고 마는 순간.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방금 들어온 친구를 위해 잠시 시간을 내어주었는데 대화가 꽤 길어지는 경우도 '선택'했다고 볼 수 있고, 친구가 방금 들어왔지만 기존 대화를 끊을 수가 없어 대화가 길어지는 경우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의도치 않았더라도 누군가가 방치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존재한다.

대화에 자연스레 녹아들면 좋겠지만, 친구의 친구가 내 친구는 아니다.

그래서, 친구가 내가 아닌 다른 친구를 선택했을 때 나는 도망간다.

내가 원치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나는 언제든 도망간다.

친구의 친구가 내 친구에게 찰싹 달라붙어 자기들만 알 만한 얘길 하고 있다면 아무리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이어도 녹아들기 쉽지 않다. 그들이 꽤나 깊은 얘길 하고 있어 참여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나는 밝은 이야기가 좋은데 쟤넨 우울한 이야기를 해 힘들 수도 있고, 트래쉬 토크나 쓰레기 토크를 내가 견디기 힘들 수도 있다.

나는 사람이 너무 늘어나 대화가 힘들어지면 언제나 인스턴스에서 도망간다.

사람이 늘어나고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내가 '듣기만 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지는데, 나는 내가 말을 하고 싶지 내가 듣고 있기만 하는 건 질색이다. 떠드는 분위기에 아무 말이나 하며 깔깔대는 분위기는 내게 어떠한 만족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인스턴스에서 도망을 간다.

친구들은 내게 또 도망간다 말하지만, 내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걸 어떡해.

옆에서 관심 못 받아도 인내하며 내가 참여할 만한 기회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건 힘들어.


미칠 듯이 도망가는 나지만, 나도 도망가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라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거나, 갈 만한 인스턴스가 없거나, 금세 대화가 끝나지 않을까 희망을 품고 기다리거나, 어딘가에 꽂힌 이유로 기다리는 상황이 있다. 조금만 인내하면 내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기다리는 상황.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끼어들 만한 틈이 생기겠지?

그 때, 인스턴스의 도망자가 아니라 방랑자가 된다.

근처에 앉아 멍하니 영상이라도 보고, 관심 전혀 없는 친구의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어보고, 사진이라도 찍는 척하며 괜한 자세를 취해보기도 하고, 옆에서 괜히 춤을 춰보기도 하고, 혹여나 누가 내 앞에서 알짱거리면 적당히 받아주다 따봉을 날리기도 한다.

괜히 월드의 사진을 유심히 관찰하고, 월드를 구경하듯이 구석구석 확인하고, 월드의 다른 층이나 다른 공간에 가보기도 하고, 물에도 빠져보고, 날아도 보고 벽 아래로도 가보고 벽 위로도 가보고, 펜으로 괜히 아무 글씨나 써보기도 하고, 정말 할 게 없으면 친구와 조금 떨어져서 조이스틱을 앞뒤로 움직여보기도 하고 무언가 쓸데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최근엔 낚시 월드가 유행이니 괜히 혼자 떨어져서 낚시를 해보기도 하고.

내 목적은 친구에게 있지만, 나는 인스턴스를 그저 방랑하고 있다.

 

도망가는 자와 남아서 방랑하는 자, 달라 보여도 다를 게 없다.

나의 자리가 없어 찾고 있을 뿐이다. 언제 생길지 모르는 나의 자리를 찾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 인스턴스가 아니라 다른 인스턴스에서, 누군가는 다른 인스턴스가 아니라 이 인스턴스에서. 내가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생길 거라고 믿으며, 도망도 방랑도 아닌 채, VRC 세계에서 그저 방황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가끔 말하곤 한다.

쟤 너 기다리는 거 같은데.

그 때부턴 내가 그 공간을 떠나야 하지만.

쟨 너랑 얘기하고 싶어 하지 나랑은 그다지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거 같아서. 나랑 대화하고 어울릴 수 있는 친구였다면 옆에서 겉돌지 않고 같이 대화하며 어울렸겠지. 나도 그렇지, 내가 너랑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내 친구 옆에서 내가 겉돌지는 않았겠지. 어쩔 수가 없다.

다들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상황과 순간이 정해져 있으니까.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