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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Chat/VRC 보고서

다른 공간, 다른 도구 [VRChat 보고서 43편]

by 심해잠수부 2024. 1. 6.

VRC에서 관계를 쌓는 방법은 다양하다.

아바타가 예쁘고, 목소리가 예쁘고, 말을 예쁘게 하고, 친구 관계가 원만하고,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고, 같이 있는 시간 동안 재밌게 해주고, 술도 같이 마시고, 예쁜 월드에 같이 가 사진도 서로 찍어주고, 게임 월드도 같이 가서 재밌게 즐기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관계를 쌓을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있을 거다.

얘넨 브얄 자주 안 하던데 왜 이렇게 친하지?
얜 걔랑 딱히 브얄에서 자주 만나지도 않던데 왜 걔한테 집착하지?
저 사람 브얄 자주 안 하던데 왜 접속할 때마다 친구 여럿이 세트지?

관계는 VRC 바깥에서도 쌓을 수 있다.

게임을 같이 하면서 쌓을 수도 있고, 트위터 같은 SNS에서도 쌓을 수 있고, 갤이나 챈 같은 커뮤니티에서 쌓을 수도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쌓을 수 있다.

 

누군가는 억울하다고 느낀다.

나는 롤 안 하는데 얘네 5인이서 맨날 롤 하더니 엄청 친해졌네 나랑은 이제 안 노네 기분이 안 좋아지려고 그러네? 얘네 별로 잘 만나지도 않으면서 SNS로 봤다고 엄청 친한 티 내네 나는 트위터 병신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안 하는데 나만 소외되네? 등등.

이런 걸로 억울해하는 사람 은근히 있다.

나 쟤랑 친하고 쟤랑 계속 끈끈한 친구로 남고 싶은데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는 게임을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고, 게임을 안 하니 게임하는 친구와 쌓는 호감도를 따라갈 수가 없고, 호감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 게임하는 친구를 항상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모습을 봐야 하고 나는 가만히 서서 친구를 잃는 기분이고.

다른 게임을 하기 시작하는 유저는 게임하는 친구들과 더 많이 친해진다. 게임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술 한 번 마셨다고, SNS에 예쁜 영상 많이 올린다고 등 VRC 외적인 무언가로 호감을 쌓는 모습을 보면 치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브얄에서 브얄만 열심히 하는 내가 옳은 거고 쟤넨 브얄 안 하고 디코하면서 브얄 버린 변절잔데? 친구창에 있는 30명 중에 20명이 다른 게임 하게 만드는 디코충 문제 있는 거잖아 자꾸 다른 게임하자고 유도하는 애들 문제 있는 거잖아. 다른 게임 그만하고 브얄을 하라니까 얘들아? 다 망했네 누가 디코 서버 만들었어?

이래서 브얄이 망하는 거구나.

쟤네가 다른 게임하느라 안 들어오는 시간에 브얄 들어왔으면 뉴비 때처럼 존나 재밌게 놀 수 있을 텐데 다 다른 게임하러 가서 재미없어졌네. 왜 브얄에선 서로 잘 보지도 않으면서 디코로 친목질하지? 왜 브얄 바깥 공간을 더 중요시하지? 브얄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닌가?

그들이 같이 놀 때 혼자 따로 놀았으니 그들과 멀어지는 건 당연한 거지만, 디코로 변절하지 않고 게임 열심히 한 내가 더 재밌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억울하다고 느낀다.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고 관점도 다르니까.

그들의 마음이 마냥 애새끼 같다고 매도할 수는 없다.
VRC에 진심인 마음이 없으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으니까.

친했던 친구들과 예전처럼 VRC에서 같이 즐기고 싶은데 그들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서 내 관계 인프라(?)가 망가지고 그래서 재미가 없어져서 답답한 거니까. 근데 정작 다른 곳에서 즐기다 온 친구들은 이전보다 더 가까이 재밌게 붙어 노니까 싫은 마음이 들 수도 있지.

내가 먼저 좋아한 사람을 다른 사람이 채가면 보쿠가 사키니 스키닷타노니 같은 마음을 느끼는 거처럼. 딱히 사귀는 사이도 아니어서 혼자 좋아했을 뿐이어서 도덕적으로 문제 삼을 수 없지만 뺏어갔다고 생각하며 친구를 원망하는 마음처럼.

 

근데,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답답해도 받아들여야 한다.

대부분의 리스너는 좋은 음악 들을 수만 있다면 방송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힙합이든 힙합이 아니든 상관없다. 그렇듯, 대부분의 유저도 친구랑 놀 수 있으면 딱히 브얄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재밌으려고 하는 거지, 굳이 VRC에서만 재밌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힙합이든 힙합이 아니든 일단 그들에게 노래가 좋게 들리는 게 우선인데 '내가 진짜 힙합'이라며 매일 화만 내고 남 욕하기만 하는 음악을 좋아하라며 주변 사람에게 강요해 봐야 아무도 듣지 않는다. 소비자들은 그가 아무리 음악을 잘 해도 그런 음악가에게 삼시세끼 밥 먹을 돈도 주지 않는다.

나는 예전에 그게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건 내가 VRC를 너무 "특별하게" 생각했던 거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하고 있다. 나는 과거에 VRC가 있고 그 다음에 관계가 있다고 믿었으니까. VRC 관계니까 VRC에서 놀아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우리는 VRC에서 만났고, VRC에서 놀기 위해 모인 거니까 VRC에서 재밌게 놀 방법을 궁리해야지 자꾸만 바깥쪽으로 눈을 돌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진 공유 등 편의성 때문에) 그룹 디코 등을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VRC를 등한시하며 디코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화면 공유 켜놓고 음성 채팅에서 하하호호 떠드느라 브얄에 들어오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브얄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의 나는 [우리가 서로 재밌게 잘 지내기 위한] 목적을 우선으로 두지 않고, [VRC에서] 우리가 재밌게 잘 지내기 위한 목적을 우선으로 두었다. "우리 관계가 지속되려면 브얄에서 재밌게 보낼 수 있어야 해" 굳게 믿고 있었다. VRC 바깥 공간에서의 관계는 다른 공간에서 다른 친구와 잔뜩 하던 거라 굳이 VRC 친구들과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디코나 하려고 내가 VRC를 한 건 아니니까.
트위터나 하려고 내가 VRC를 한 건 아니니까.

원래 알던 친구들과 디코에서 놀려면 언제든 놀 수 있는데 굳이 얘네랑 디코를?
트위터도 친구들이랑 쓸 만큼 써봤는데 얘네랑 굳이 트위터를?
디씨 옛날옛적에 잔뜩 하고 접었는데 굳이 얘네랑 갤을?

나와 잘 놀던 친구가 어느 순간부터 VRC 외의 공간에 잡혀있는 일이 싫었다.

 

내가 지향하는 바에 따라 내 생각과 행동이 달라진다.

그 때는 VRC라는 [공간]을 집착할 정도로 좋아했지만, 지금은 VRC라는 공간에 딱히 흥미가 없다. (VRC에서 만난) 친구들과 재밌게 놀 수 있다면 어떤 방식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을 거 같다. VRC에서 본 친구라고 굳이 VRC에서만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 서로 재밌게 놀기만 하면 됐지.

내 마음이 어디에 쏠려있느냐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 때는 기존 친구들과 친하게 잘 지낼 때라 거기가 메인이라고 생각했고, VRC 친구들은 VRC에서만 보길 바랐다. 반면, 지금은 기존 친구들보다 VRC에서 친해진 친구들과 훨씬 더 친하다. 더 좋은 기억도 많고. 지금 친구들과 '친구'로 잘 지내고 싶으니 다른 공간에서 다른 도구를 사용하는 일에 대한 거부감도 옅어졌다.

VRC는 조금만 못 봐도 거리가 빨리 멀어지는 게임이니까. 나도 당장 다음 주부터 평소보다 바쁠 예정인데, 그럼 기존 친한 친구들과 사실상 생이별을 하게 되는 셈이다. VRC에서만 봐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디코나 트위터 등으로 짧게나마 연락을 주고받다 보면 게임에서 볼 시간이 많이 없어도 많이 본 듯한, 연예인이 티비에 자꾸 나오니까 연예인과 한 번도 대면한 적 없는데 어쩌다 마주치면 친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효과를 얻어갈 수 있다.

VRC라는 공간이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이야기가 불쾌할 수도 있다.

VRC를 안 하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행동 자체가 VRC에서 사람을 빼가는 행동이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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